몽테뉴의 수상록/1.4
우리 동네에 한 신사가 계셨다. 통풍을 오래 앓으셨는데, 의사들이 소금에 절인 고기를 금하자 그분은 웃으며 대답하셨다. “고통에는 원망할 대상이 필요하지요.” 그러면서도 가끔은 세루엘라트 소시지를, 또 어떤 날엔 소의 혀를 향해 소리 높여 욕을 퍼부었다. 그런 뒤엔 한결 마음이 가벼워졌다고 하셨다.
사람은 마음속 분노를 어딘가에 기대고 싶어 한다. 그것이 살아 있다는 증거인 양, 우리는 허공을 향해 팔을 휘두르고, 때로는 바람에 대고 욕을 한다. 그러나 팔을 휘두를 땐 조심해야 한다. 너무 가까이 다가서면 상처를 입고, 너무 멀면 바람처럼 사라져버릴 수 있다. 영혼도 그렇다. 멈출 수 있는 자리, 머무를 수 있는 무게가 있어야 한다.
플루타르코스는 어떤 사람들이 원숭이나 작은 개를 사랑하는 이유를 ‘진짜 사랑의 부재’ 때문이라고 했다. 사랑해야 할 대상이 없으면, 사람은 엉뚱한 곳에 정을 붙인다. 스스로를 속이면서까지, 진짜가 아닌 것을 진짜처럼 여긴다. 심지어 자신이 믿는 바와 어긋나더라도 그렇게 한다.
짐승도 아픔을 당하면 그 상처를 준 바위나 쇠붙이를 물어뜯는다. 로마 시인은 말한다. 팬노니아의 곰은 창에 찔린 뒤, 자신을 찌른 창을 도리어 껴안고 원을 그리며 분노한다. 우리 인간도 다르지 않다. 세상의 슬픔과 손해에 분노를 느끼지만, 정작 누구에게 그 감정을 쏟아야 할지 모를 때, 하염없이 머리칼을 뜯고 가슴을 친다. 그러나 그 머리칼도, 그 하얀 가슴도 우리를 해친 것은 아니다.
옛 로마 병사들은 장수를 잃고 나서 울며 서로의 이마를 부딪쳤다 한다. 그 울음은 누구를 향한 것이었을까. 철학자 비온은 슬픔에 빠진 채 농담을 했고, 어떤 이는 잃어버린 돈의 복수를 하겠다며 카드며 주사위를 씹어 삼켰다.
크세르크세스는 바다에 채찍을 들었고, 키루스는 강에게 화를 냈다. 칼리굴라는 어머니의 추억이 깃든 집을 파괴했다. 어느 나라 왕은 신의 벌을 받았다고 하여, 십 년 동안 그 신의 이름조차 부르지 못하게 했다. 그것은 어리석음이었지만, 그 속엔 인간적인 진심도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슬픔과 분노는 자주 오만으로 흐른다. 폭풍을 만난 아우구스투스는 넵튠 신을 향해 신상을 옮겼고, 바루스 장군을 잃은 뒤에는 벽을 치며 “병사들을 돌려다오!” 하고 울부짖었다. 이처럼 사람은 종종 신에게도 화살을 겨눈다. 마치 번개가 치면 하늘을 향해 활을 쏘는 트라키아인처럼 말이다.
그러나 바람은 화를 내지 않는다. 물은 억울하다고 소리치지 않는다. 그래서 우리가 진정 다스려야 할 것은 세상보다도 우리 안의 마음이다. 흐트러진 영혼, 그 혼란이야말로 우리가 붙잡아야 할 진짜 대상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