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으로 이동

물리학사/과학혁명의 시작

위키책, 위키책

이슬람 지식의 전파

[+/-]

전에서 살펴보았듯이, 고대 그리스의 지식은 중세와 함께 유럽에서 기독교스러운 것만이 전승되고, 헬레니즘 문화권에서만 보존되었다. 이 지식은 이슬람의 부흥과 함께 이슬람 세계로 흡수되었고, 독자적으로 발전해 나갔다. 한편, 이베리아반도의 정복(알-안달루스)과 기독교 세력의 재정복(레콩기스타) 과정을 통해 이슬람 세계에서 쌓아올린 지식은 유럽으로 다시 들어왔다.

톰마소 다퀴노가 아리스토텔레스의 사상을 바탕으로 신학대전을 집필하는 한편, 이븐 루시드(아베로에스)의 지식이 퍼지는 것으로 알 수 있듯이, 여타 다른 지식들도 점차 유럽으로 퍼져나갔다. 이로서 아리스토텔레스의 사상과, 이슬람 세계에서 발전된 지식들이 유럽으로 서서히 퍼져나갔다.

관성

[+/-]

아리스토텔레스의 세계관에서는 4원소설을 전제로 하기 때문에, 4원소를 바탕으로 생겨난 만물은 자신의 자리가 존재하고, 자연스럽게 그 자리로 돌아간다는 것으로 위치를 설명한다.(자연학) 우리가 으레 느낄 수 있듯이, 일상생활에서 보는 운동의 대게는 마찰력이 존재하여 자연스럽게 멈추는게 그런 이치이다. 이 설명을 위해서는 천동설이 전제가 되어야 한다. 아리스토텔레스가 말하는 위치는 위와 아래 즉, 중력의 방향에 따라서 존재하기 때문이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지구가 둥글다고 추정했기 때문에(월식) 위치는 곧 지구의 중심에서 천상을 향하는 방향으로 정해지는 상대적 위치인 것이다. 또, 아리스토텔레스는 지구가 둥글기 때문에 완벽한 구라고 주장했고, 천상의 것은 완벽하므로(천체에 관하여) 원운동을 한다고 주장했다. 아리스토텔레스의 세계관에서 운동은 원래 자리로 돌아가는 과정이었다.

아리스토텔레스의 이러한 세계관에 대한 의심은 학문이 발전하면서 계속 제기되었다. 이슬람 세계에서 관성에 대한 의심이 있었고, 유럽에서도 있었다. 갈릴레이가 관성(Inertia)를 언급하기 전에 이와 가장 가까운 개념에 다가간 것으로 언급되는 사람은 장 뷔리당이다. 이 때는 임페투스(impetus)라는 용어를 사용했다. 개념도 정립하는 과정에 있으므로 관성과는 크게 다르다.

관성은 후에 갈릴레오 갈릴레이가 대화를 출간하면서 잘 알려지게 된다.

프톨레마이오스 우주관과 코페르니쿠스

[+/-]

코페르니쿠스는 로마 카톨릭의 사제이자, 대졸자다. 이 시대의 대졸자라고 함은, 자유학예를 배운 사람이다. 자유학예는 3학(trivium) 4과(quadrivium)로 이루어진 커리큘럼으로, 문법, 수사, 논리가 기초적인 3학, 산수, 기하, 천문, 음악는 조금 더 심화된 4과에 속했다.[1] 이 때의 천문은 프톨레마이오스의 알마게스트를 바탕으로 두고 있으므로, 코페르니쿠스가 배운 것은 주전원을 가지고 있는 천동설이었다.

프톨레마이오스의 천동설에는 큰 문제가 있었는데, 복잡하다는 것이다. 그래서 코페르니쿠스는 좀 더 편안한 방식으로 바꿔보려고 했다. 이는 기하학적인 특징에 비롯되는데, 천동설에서 궤도와 주전원은 기하학적으로 해석할 때 적절하게 다른 방식으로 바꿀 수 있었다. 주전원을 도입하지 않았다면, 주전원 개념을 생각하고 난 다음에 바꿔서 주전원을 추가해야 할텐데, 주전원이 이미 들어가 있었기에 한 가지 단계가 생략됐다. 이것으로 출판된 것이 천구의 회전에 관하여이다.

코페르니쿠스는 바로 출판했던 것이 아니다. 일단 원고를 만들어 놓기는 했는데, 출판을 하는데 망설였던 것 같다. 그러던 중에 레티쿠스가 원고 안에 있는 삼각법을 참고했고, 이것이 계기가 되었는지, 코페르니쿠스가 출판하게 된다. 죽기 1년 전에. 물론 주변 성직자들의 권유도 있었다. 코페르니쿠스는 이단으로 몰릴 것을 걱정했는지, 교황에게 편지를 먼저 보내서 일종의 보험을 들어놓았다. 마틴 루터가 성경을 인용하면서 비판한 적이 있었기 때문이다.

앞으로도 계속 등장할 "단지 수학적 도구에 불과하다"라는 변명은 종교권력이라든지 아니면 사상가들의 공격으로부터 피하는 마법의 문장이다. 물론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속적인 공격이 존재할 수도 있고, 그게 다수가 될 수도 있지만, 코페르니쿠스는 이런 발언을 통해 이단으로 몰릴 걱정은 덜었다. 코페르니쿠스의 체계에서는 여전히 천상의 것은 완벽해야 했으므로, 모든 천체들은 여전히 원운동을 했다. 더 복잡한 원운동을 했다. 그래서 사실 프톨레마이오스의 천동설보다 더 많은 주전원을 도입했지만, 현실과는 좀 더 잘 맞았다. 또, 마틴 루터의 말이 신경 쓰였는지, 태양은 우주의 중심에 있지 않다고 했다.

코페르니쿠스의 이런 시도는 갈릴레이의 관측을 해석하는데 도움을 준다. 또 갈릴레이가 줄을 완벽하게 타지 못하는 바람에 금서로 지정된다. 이 한 사제의 관점의 전환이 과학혁명을 이끄는 시작점이 된다.

갈릴레오 갈릴레이

[+/-]

죠르다노 브루노

[+/-]

죠르다노 브루노는 아마 헤르메스주의자로, 갈릴레오 갈릴레이가 종교재판에 회부될 건덕지를 준 사람이다. 이단적인 성격의 주장을 계속 주장하여 화형을 당했다. 후에 1899년에 종교의 자유와 사상의 자유를 대표하는 인물로 동상이 만들어져, 실제로 그가 그런 자유를 위해서 싸운 것인지는 몰라도 히파티아처럼 교회권력을 비판하기 위한 용도로 사용된다.

튀코 브라헤와 케플러

[+/-]

튀코 브라헤는 굉장히 눈이 좋은 덴마크 천문학자이다. 갈릴레이가 망원경을 발명했으나, 튀코는 망원경 없이 천체관측을 진행했다. 그리고 굉장히 좋은 눈을 통해서 굉장히 상세한 천체관측 데이터를 축적했다. 튀코 브라헤는 코페르니쿠스의 우주관을 비판하면서도, 기존에 설명되지 않은 현상들을 설명하기 위해 우리에게는 튀코의 절충설로 알려진 천체모델을 만들었다. 여전히 천동설이라는 틀 안에서 태양을 중심으로 태양의 "달"인 내행성(수성과 금성)이 돌고 있는 모델이다.분명 아리스토텔레스의 우주관에서는 천상은 완벽해야 하는데, 이 모델에서는 완벽하지 않다.

튀코 브라헤에는 계산기(컴퓨터라고 부른다.)가 하나 있었는데, 그가 바로 요하네스 케플러이다. 천문학에서 관측데이터를 분석해주는 사람을 컴퓨터라고 불렀었다. 요하네스 케플러는 굉장히 피곤한 삶을 사는 사람이었으나, 튀코 브라헤의 제자이자 계산기로 활동했기 때문에, 천체에 대해서 깊이 탐구할 수 있었다. 케플러는 튀코 브라헤가 방광염으로 죽은 이후 튀코의 관측 데이터를 바탕으로 케플러 3법칙을 발표한다. 케플러 3법칙은 후에 뉴턴에 의해서 아주 깔끔하게 설명한다.

합리주의와 기계론적 세계관

[+/-]

르네 데카르트의 비범한 인생은 유럽 철학사에 큰 영향을 끼친다. 르네 데카르트는 유럽에 합리주의와 기계론적 세계관이라고 하는 큰 철학적 사조를 남겼다. 이에 대해서 장단점이 있었는데, 장점은 정말 합리적이었다는 것이고, 단점은 버려도 될만한 것도 계속 붙잡고 있다는 것이다. 특히 데카르트의 설명에서는 원격작용은 비합리적이었는데, 뉴턴의 중력이론에서는 접촉작용은 불필요한 것이었기 때문이다. 이 때문에 합리주의자 혹은 기계론자들의 비판을 피하고 싶었던 뉴턴이 도입한 "에테르"는 마이컬슨이 실험할 때까지도 모든 파동은 반드시 매질이 있어야 한다는 오해를 심어주었다.(빛과 중력파는 매질이 필요하지 않다.) 물론 원격작용은 여전히 비합리적이었으므로, 꾸준히 논란이 됐다.

  1. 자유학예의 배경에 대해서는 이 논문을 참조. 한국어 논문이다. 또, 요즘(사실 2010년대의) 대학교육에 있어서 리버럴 아츠니 후마니타스니 하는 말들이 사실 이 자유학예를 바탕으로 나온 것들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