물리학사/이슬람 황금기와 다퀴노
로마의 기독교의 국교화
[+/-]역사에서 가장 안타까운 순간을 뽑으라면 그리스의 학문이 제대로 전수 되지 않았다는 것을 뽑을 수 있을 것이다. 아우구스티누스가 기독교의 교부철학을 집대성 해준 덕분에 로마에서는 신플라톤주의가 성행하기 시작했다. 플라톤의 아카데미아를 통해서 내려오는 체계는 이제 신을 위한 것이었고, 여기서 그리스의 여럿 고전들이 잊혀져 갔다. 그중에는 아리스토텔레스의 서적도 포함되어 있다. 서로마까지 무너지면서 이런 고전들을 이어줄 이는 서유럽에서 서서히 사라져갔다.
그러나 이런 신학이 중요하던 시대에도 비잔틴에는 그 문화가 계속 계승되고 있었다. 여전히 그리스어와 라틴어로 되어있는 고전들은 존속하고 있었고, 이것들은 이 지역에서 계속 내려오게 되었다.
무세이온
[+/-]이런 기독교에 반지성적인 파괴의 예시로 드는 것이 히파티아의 죽음이다. 물론 이 예시 자체가 계몽주의자들이 잔다르크와 같이 기존 기독교가 반이성적임을 들어내기 위해서 발굴한 사례임에는 주의할 필요가 있다. 잔다르크와 마찬가지로 처녀성을 부각함으로써 기존 기독교가 부도덕하다는 것을 강조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역사라는 학문 자체가 다른 학문보다도 더 정치적이거나 시대정신에 영향을 받는 면이 있기 때문에, 조심스럽게 받아들여야 할 것이다.(이 예시 같은 경우 처녀성을 강조하고 있기 때문에 동시에 여성성을 가지고 있고, 이것은 또 페미니즘적인 시각에서도 히파티아를 남성권력에 희생당한 여성으로 볼 수도 있을 것이다. 우리가 비판적으로 바라볼 때는 아마 히파티아가 기독교에 얼마나 신실하였는지, 이 사건에서 히파티아의 여성성이 얼마나 중요하게 작용했는지를 따져봐야 할 것이다.)
히파티아, 현재까지 알려진 바로는 최초의 여성 수학자(물론 진짜 최초의 여성 수학자는 아닐 것이다.)는 알렉산드리아 도서관장 테온의 딸로, 수학과 철학을 배우고, 가르치던 사람이었다. 무세이온(Μουσεῖον)은 그녀가 일하던 일종의 연구소로, 알렉산드리아 도서관에 딸려 있는 연구소였다. 후에 영어에서 박물관을 의미하는 단어인 museum의 어원이 된다. 이곳의 역사는 헬레니즘 시대부터 이어진다. 그녀가 태어난 것은 4세기 중반 정도로 추정하고, 415년에 기독교 폭도에 의해서 사망한다. 알렉산드리아라는 도시의 정치싸움에 희생자가 된 히파티아는, 총독 오레스테스의 조언자로서 역할을 하고 있던 와중, 성 키릴로스와의 불화로 인해 기독교인들의 반발을 사게 되고, 이 폭도들은 집으로 가는 히파티아의 마차에서 히파티아를 끄집어 내어 알몸으로 벗기고, 살해하게 된다. 자세한 이야기는 위키피디아에 잘 나와있다.
히파티아의 처녀성과 죽음에 관한 이야기가 맞물려, 히파티아를 묘사한 작품에서는 히파티아를 소녀로 묘사하지만, 히파티아의 생몰연도를 보수적으로 잡아도 45세이기 때문에 이는 왜곡하여 묘사한 것이므로, 히파티아와 관련한 작품을 볼 때도 비판적으로 바라볼 필요가 있다.
이슬람의 황금기
[+/-]7세기 무렵 무하마드에 의해서 창시된 이슬람은 이전의 세계와는 다른, 좀 더 평등한 세계를 외치면서 새로운 종교로 부상했다. 기존 체계에 대한 새로운 대안인 이슬람은 중동으로 퍼져나갔고, 이는 곧 제국화 되어 이슬람 제국이 되어서 이슬람의 황금기를 이끌게 된다.
지금이야 탈레반 같은 이들이 소위 서구문명을 거부하며 반지성주의적인 행태를 부리고 있지만(물론 극단주의 세력이라 더 부각되는 면은 있다.), 이슬람의 황금기에서 이슬람은 지식과 문화의 꽃이 피고 있던 시기이다. 지혜의 집 같은 학문기관을 만들었고, 여기서 이슬람 문명의 지혜는 고대의 지식들과 외부의 지식들을 바탕으로 성장하고 있었다. 헬레니즘의 고전들은 아랍어로 번역되어 보전하게 된 것이다. 삼각함수의 sin, cos, tan같은 용어도 이 때에 인도에서 얻은 지식을 바탕으로 전수되어서 유럽에서 사용된 것으로 알려져있다.
알 콰리즈미의 대수학(Algebra)나 알 이드리시의 삼각법, 이븐 시나의 광학의 서 등 이슬람 문명은 지식과 도서관을 기반으로 점점 축척되어 갔다. 특히나 광학의 서는 광학 자체로도 아름답지만, 과학적 방법을 최초로 만든 책으로 알려져 있다. 이외에도 의학이나 화학에서도 대단한 진전을 이루었고, 이것은 유럽 언어에서 아랍어의 흔적을 남기게 했다.
이슬람의 황금기는 기존의 기독교의 영역에도 침범하게 된다. 그 중에서 가장 주목해야 할 부분은 시칠리아 섬, 그리고 알-안달루스(الأَنْدَلُس)다. 알-안달루스는 간단하게 말해 이베리아 반도이다. 이슬람 제국은 711년부터 이베리아 반도를 점령하기 시작했는데, 언제는 이베리아 반도의 대부분을 이슬람 세력이 점령하게 된다. 이것은 물론 기독교인들에게는 재난이었을 수도 있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새로운 지식이 전파되는 것으로도 볼 수 있다.
유럽으로의 지식 전파
[+/-]유럽대륙에 이교도가 존재한다는 것만으로도 충분한 전쟁 명분이 된다고 생각한 기독교인들은 무려 700년간 이베리아 반도에서 이슬람을 밀어낸다. 이는 다시 말해서 명분이 충분해도 별로 정복할 의지가 없었다는 뜻이기도 하다. 각설하고, 이것은 후에, 아주 후에 레콩기스타(재정복)이라고 부르는데, 1100년도 즈음에 톨레도 지방을 다시 탈환하게 된다. 그리고 톨레도는 큰 도시였고, 여기에는 최신 학문들이 보관된 도서관이 있다. 여기에 파견된 대주교 레이몽(Raymond de Sauvetât)은 번역 운동을 벌이게 된다.(김정명, 2014, 아랍어-라틴어 번역 운동이 유럽 르네상스에 미친 영향)
다른 한 편 시칠리아에도 이슬람 세력이 점령하게 되었다. 827년에 정복 당한 후 831년부터 1091년까지 시칠리아 토후국이라는 형태로 존재하게 된다. 그리고, 노르만족이 떠돌이 생활을 하다가 이탈리아 남부에 정착(정복)하는 과정에서 시칠리아 토후국 역시 정착당하게 된다. 이 지역을 점령한 용병은 이교도들에게도 관용적인 통치를 하고, 이 용병의 손자이자 시칠리아인인 프리드리히 2세는 이슬람 문화에 상당한 관심을 보이게 된다.
여기서 말하는 프리드리히 2세는 프로이센의 감자대왕이 절대 아니고, 신성로마제국의 황제이다. 다시 말해서 이 이슬람 문화에 관심이 많은 시칠리아인은 신성로마제국의 황제가 된다. 세속권력의 정점에 올라서게 된 것이다. 이는 또 다시 말해서, 교회권력과의 대립의 정점에 서있다는 말이 된다.
프리드리히 2세는 교회권력에 맞서기 위해 나폴리 대학을 세웠고, 그 전에 마이클 스콧(Micheal Scot)을 후원해, 이 사람이 아랍어에서 번역한 라틴어판 아리스토텔레스 서적을 가져왔다. 그리고 그 나폴리 대학에서 톰마소 다퀴노(Tommaso d'Aquino, 토마스 아퀴나스로 더 알려져 있다.)가 수학한다.
톰마소 다퀴노
[+/-]이 내용은 토마스 아퀴나스 연구소에서 더 자세히 다루고 있다.
성 톰마소 다퀴노가 이룬 업적은 기독교 신학 쪽에서 엄청난 것이다. 신학대전이라는 책을 집필하고, 천사 박사라는 이명도 얻었다. 그것보다도 과학사에서 더 중요한 것은 이 사람 덕분에 과학혁명이라는 100년동안의 사건에서 코페르니쿠스, 갈릴레이, 뉴턴과 대척점에 있던 아리스토텔레스의 지식이 전파가 되었다는 것이다.
톰마소 다퀴노는 프리드리히 2세가 나폴리 대학을 세운 해에 태어나서, 나폴리 대학에서 수학했다. 이 때 얻은 지식 중에 하나로 추정되는 것이 아리스토텔레스의 서적들인데, 톰마소 다퀴노는 이 책들의 주해를 달았다.(1260년) 이미 중역될대로 되어 있어서(그리스어 → 시리아어 → 아랍어 → 라틴어) 원래 의도를 제대로 파악하지 못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이 사람의 영향력을 생각해봤을 때, 다퀴노의 주해가 달린 책은 사실상 중세 이후의 아리스토텔레스의 서적들이라고 생각할 수 있으며, 앞서 소개한 아리스토텔레스의 이야기들은 이 판본에서 시작한다고 볼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