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국의 역사
다음은 영국의 역사에 관한 내용이다. 영국은 옛날부터 역사가 많기로 유명한 대제국으로 알려져 있다. 지금도 영국은 혁명이 일어났음에도 불구하고 유구한 문화들이 남아있으며, 첫 번째로 의회 민주주의를 시행한 나라인 입헌 군주국이기도 하다. 아울러 외국인들도 서양 역사에서 첫 번째는 영국 역사라고 말할 정도로 영국은 역사가 깊다.
고고학적 자료
[+/-]스톤헨지
고대
[+/-]브리타니아 시대
[+/-]영국은 사방이 바다인 섬으로 이루어진 나라로, 로마 제국의 원정 이전에는 본래 원주민들인 켈트 족들이 편히 생활하면서 지냈다. 그러나 대 로마 제국이 대 카르타고 제국과의 대전쟁에서 크게 승리함으로써, 대 카르타코 제국을 멸망시키고 지중해 주변의 모든 나라들을 점령했다. 그리고 영국은 54년 대 로마 제국의 집정관인 카이사르의 침공을 받았다. 켈트 족들은 대 로마 제국과 치열한 전투를 벌였지만, 대 로마 제국의 군사력이 더 뛰어났기 때문에 할 수 없이 영국은 대 로마 제국과의 전쟁 패배를 인정했다. 그리고 이 시점부터 영국은 대 로마 제국의 지배를 받게 되었다. 이름은 브리타니아로 불렸으며, 약 400년 간 대 로마 제국의 지배를 받았다.
그런데 대 로마 제국이 멸망의 길을 걷기 시작할 때, 느닷없이 북부 유럽에 거주하고 있는 게르만 족의 침공을 받았다. 본래 게르만 족은 북부 유럽 지역에서 평화롭게 살고 있었으나, 동양 세계에 거주하고 있던 훈 족의 침입을 받고 결국 대 로마 제국으로 이주한 것이다. 그런 대 로마 제국은 게르만 족을 푸대접하기 시작했고, 끝내는 게르만 족의 불만이 차서 대 로마 제국과의 전쟁을 선포했고, 대 로마 제국의 절반을 멸망시키고 말았다. 그리고 영국은 어느 정도 독립을 할 수 있었으나, 여전히 대제국이 아닌 그냥 평범한 국가였다. 즉 황제가 지배하지 않고, 각 지방의 군주들이 다스리고 있는 도시 국가의 성격이 강했다.
그래도 사방이 바다였던 섬으로 이루어진 나라인 덕분에 영국은 다른 제국들로부터 침공을 별로 받지 않았다. 설사 영국에 침공하더라도 영국에 관심을 가지고 있는 제국은 별로 없었으며, 섬 제국인 영국을 점령해봤자 그다지 큰 이익을 얻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그런 영국을 노리는 세력들이 등장하기 시작했다. 바로 북부 유럽의 노르만 족이 영국에 침공하기 시작했는데, 이 노르만 족은 해군이 상당히 강했으며 전 세계 바다를 누리고 다니는 약탈 세력들이었다. 그 때문에 영국도 큰 고통을 치른 적이 있었지만, 영국도 적의 침입에 대비하면서 열심히 전투에 임했기 때문에, 쉽게 멸망하지는 않았다. 그렇지만 혼란에 휩싸인 영국은 이제 새로운 주인을 맞이할 시대가 오는데.
중세
[+/-]노르만 왕조의 등장
[+/-]이렇게 뒤숭숭한 영국은 한 때 앵글로색슨 족의 침공을 받아서 그들의 지배를 받게 되었다. 이 때 영국의 상황은 나빴으며 결국 6세기에 영국은 7개의 왕국 시대가 찾아오면서 제국이 분열되고 말았다. 하지만 829년 통일 왕국을 이루고 다시 영국은 나라의 구실을 갖추기 시작했다.
당시 영국을 다스리고 있었던 해럴드 2세는 무능력자였다. 그래서 백성들에게 원성을 많이 받았으며, 설상가상으로 노르망디 공국의 공작인 윌리엄이 침공하기 시작하자 당황하기 시작한다. 본래 윌리엄은 서부 프랑크의 왕에게 충성을 다하고 있는 신하였다. 그러나 정복 욕심이 상당히 강했고, 다른 영토를 점령해서 자신이 왕이 되고 싶어 했다. 하지만 윌리엄은 서부 프랑크 왕에게 충성을 다하고 있는 상태라 감히 서부 프랑크 왕국을 무력으로 점령할 수 없었다. 그래서 윌리엄은 시선을 바다 밖인 영국을 점령하기로 마음먹었다.
어쨌거나 1066년에 윌리엄은 해럴드 2세와의 전투에서 크게 승리하여 잉글랜드 왕국의 국왕의 자리에 올라 윌리엄 1세 칭호를 받고 백성들을 다스리기 시작한다. 이때부터 노르만 왕조의 치세가 시작된다. 윌리엄 1세는 우선 백성들을 안심시키는 한편, 둠스데이 북이라는 제도를 시행했는데 이 제도는 바로 영토 조사였다. 즉 세금을 효율적으로 걷어가서 이것을 토대로 재산을 쌓아 왕국의 발전을 위한 정책이라고 볼 수 있으며, 이것은 서양 세계에서 첫 번째로 시행된 대 영국 제국의 봉건 제도가 되었다고 할 수 있다. 속칭 봉건 제국인 노르만 왕조 시대라고 일컫는 시기이다.
그런데 윌리엄 1세가 잉글랜드 왕국을 다스리게 되자 문제가 생겨버렸다. 그것은 바로 잉글랜드 왕국은 사회적으로나 문화적으로나 엄청난 변화를 겪을 수밖에 없었으며, 언어조차 프랑스어가 사용되었다. 영국어는 상스럽다고 해서 금지되었고, 황궁과 관청 등에서는 프랑스의 영향을 많이 받아 변화를 겪게 되었다. 그리고 노르망디 공국의 주인은 서부 프랑크 황국의 대천황에게 충성을 맹세한 신분이었고, 동시에 새로운 정복지인 잉글랜드 황국의 대천황이 되었으므로 잉글랜드 황국의 대천황은 곧 서부 프랑크 황국의 대천황의 신하라는 묘한 관계가 성립되고 말았다. 그런 잉글랜드 황국의 대천황은 실제로 세력이 서부 프랑크 황국보다도 강대했기 때문에, 비록 신하의 처지라고 해도 자신보다 세력이 약한 서부 프랑크 황국의 대천황에 대한 불만과 자신감을 갖게 된다. 이것이 끝내는 백년 전쟁이라는 비극적인 시대가 시작되는 원인으로 자리 잡았다.
마그나 카르타의 제정
[+/-]십자군 전쟁이 지나가고 난 이후 교황의 힘은 상대적으로 약해졌고, 반대로 황제과 왕, 귀족들과 백성들은 힘이 강해지기 시작했다. 이는 곧 기존의 봉건 체제의 붕괴가 오는 시점이 되기도 한다. 어쨌거나 십자군 전쟁에 참여한 대제국들은 세금 때문에 애를 상당히 먹고 있었다. 서양의 여러 제국들의 대천황들은 멋대로 백성들로부터 세금을 엄청 거두었고 군대조차 자기 멋대로 관리하기 시작했다. 상대적으로 귀족들의 세력은 약해졌으며, 이는 곧 서양의 여러 제국들이 점점 절대 황권 체제를 확립해 나간다. 그러나 귀족들이라고 참고만 있을 수는 없었는데, 특히 이러한 겨룸이 가장 심했던 제국은 잉글랜드 황국이었다.
당시 대천황이었던 사자심황(獅子心皇) 리처드 1세 대천황이 다스리고 있었으나, 십자군 전쟁이 터지자 대천황의 자리를 오랫동안 비울 수 밖에 없었다. 그런 대천황의 자리는 공교롭게도 리처드 1세의 남동생인 존 대천황이 이어받았다. 존은 본래 앙주 가문의 앙리가 잉글랜드 황국에 건너와서 플랜태저넷 황조를 세운 헨리 2세 대천황의 네 번째 아들이었다. 그러므로 초대 노르만 황조의 정복 대천황인 윌리엄 1세의 자손은 이미 끊겨진 상태. 아무튼 1189년에 헨리 2세가 사망하고 세 번째 아들인 리처드 1세가 잉글랜드 황국의 대천황의 자리에 올랐으나, 십자군 전쟁이 발발하여 결국 황좌를 오랫동안 비울 수밖에 없었다. 그러므로 사실상 존이 잉글랜드 황국의 대천황 노릇을 많이 하고 있었다. 사실 리처드 1세와 존은 사이가 매우 좋지 않았다고 전해지며, 둘의 성격도 서로 맞지 않아서 늘 다툼을 일으켰다고 한다.
1199년에 리처드 1세가 잉글랜드 황국으로 돌아오자마자 바로 병으로 사망했고, 그 뒤를 바로 존이 이어받아 실제로 대천황의 자리에 오른다. 그러자 잉글랜드 황국은 점점 소란스러워지기 시작했는데, 존은 정치와 경제 등 모든 방면에서 매우 뒤떨어지는 대천황이었기 때문이었다. 특히 존은 대 프랑스 제국과의 전쟁을 명목으로 세금을 상당히 많이 올려서 백성들의 원한을 샀다. 부끄럽게도 잉글랜드 황국은 대 프랑스 제국과의 전쟁에서 크게 패배했고, 게다가 존은 대교황과 크게 다퉈 결국 파문을 당하는 등 존 대천황의 정치는 어지럽기 짝이 없었다. 때마침 잉글랜드 황국의 귀족들과 백성들과 노예들이 모두 크게 반란을 일으켰다. 이들은 합심하여 완전 무장을 한 채로 63개의 요구 사항이 적힌 서류를 들고 황궁을 급습했다. 그리고는 존을 생포하여 자신들의 요구를 들어달라고 협박하기 시작했다.
결국 1215년에 존은 그들의 힘에 눌려 63개 조항에 서명을 하고 말았다. 이것이 바로 독재를 막고자 발표된 마그나 카르타()로 잉글랜드 황국의 대천황의 권한은 상당히 떨어지고 말았다. 반면에 귀족들과 평민들과 노예들의 권한은 상당히 강해지고 말았다.
절대 황정과 장미 전쟁
[+/-]잉글랜드 왕국은 프랑스 왕국과의 백년 전쟁에서 패배하여 다시 내란에 휘말리기 시작한다. 잉글랜드 왕국의 왕위를 두고 두 개의 귀족 집안인 랭커스터 가와 요크 가는 30년 동안 장미 전쟁을 펼쳤다. 참고로 랭커스터 가는 빨간색 장미의 문장을 가지고 있었고, 요크 가는 흰색 장미의 문장을 가지고 있었다. 그래도 비로소 랭커스터 가가 승리하여 헨리 튜더가 황좌에 올랐을 때에는 한때 원수지간이었던 요크 가와 다시 화합하여 대제국을 발전시키는 데 큰 노력을 하기 시작했다. 대부분의 귀족들과 대영주들이 죽어버려서 세력이 약해진 탓에 헨리 튜더는 강력한 황권을 확립하기 시작한다. 참고로 헨리 튜더가 헨리 7세로 대 영국 제국의 역사에서 가장 유명한 헨리 8세의 아버지이자 엘리자베스 1세 대천후의 친할아버지가 되는 사람이다.
근세
[+/-]엘리자베스 1세 대천후의 치세
[+/-]1547년에 헨리 8세 대천황이 사망하고, 대 영국 제국은 엄청난 혼란에 빠졌다. 그런 헨리 8세의 뒤를 이은 에드워드 6세 대천황까지 1553년에 병으로 사망하고 말았으니, 대 영국 제국의 대천황의 자리는 헨리 8세의 첫 번째 대천후인 메리에게 돌아가고 말았다. 그런데 메리는 아주 포악한 정치들을 했는데, 바로 자신의 어머니인 캐서린 대천후가 헨리 8세에게 버림을 받고 외롭게 살아가게 되자, 캐서린은 자신의 딸인 메리에게 자신의 원한을 풀어달라고 말했기 때문이었다. 그런 메리도 자신의 남편이자 대 에스파냐 제국의 대천황인 펠리페 2세에게마저 버림받고, 대 영국 제국의 국교를 가톨릭으로 정함과 동시에 성공회마저도 폐지시키는 정책을 폈다. 메리는 워낙 의심이 많은 대천후였으며, 헨리 8세 대천황과 앤 불린 대천후 사이에서 난 자신의 이복동생인 엘리자베스 1세마저도 전혀 믿지 못했다. 이것이 결국 대 영국 제국 전체로 소문나자, 대국민들은 메리 대천후가 자식이 없이 죽기를 바라기까지 했다.
결국 1588년 메리 대천후가 자식 없이 사망하자, 엘리자베스 1세가 대천후의 자리에 오른다. 이제 대 영국 제국은 45년 동안 절대 황권을 누리게 되었으며, 엘리자베스 1세는 대국민들의 축복과 환호를 받았다. 왜냐하면 엘리자베스 1세는 정통 대 영국 제국에서 태어난 사람이었고, 헨리 8세의 강한 정신도 물려받음과 동시에 여자다운 매력마저 뛰어났다. 엘리자베스 1세는 과거 메리 대천후와는 다르게 정치에 힘을 많이 썼으며, 군사력 증강에도 큰 힘을 써서 대 영국 제국의 군사력을 강력하게 키워나갔다. 또한 엘리자베스 1세는 종교 문제에도 관여하지 않고, 종교의 자유를 인정함으로써 대국민들의 지지를 받을 수 있었던 것이다.
이후 대 영국 제국은 강력한 대제국으로 거듭나기 시작한다. 우선 대 영국 제국은 해군을 강력히 육성하여 서양 세계 아니 전 세계를 통틀어 가장 강력한 해군력을 보유하게 된다. 엘리자베스 1세는 강력한 해군을 이용하여 무적 함대를 건설하여 해상 패권을 장악하였다. 그리고 북부 아메리카 대륙에 식민지를 건설하였고, 또 대 인도 제국을 공격하여 동부 인도에 무역 회사를 만들어 동양 세계와 활발한 무역을 할 수 있게 했다. 이것은 엘리자베스 1세가 겉은 부드러웠지만 속은 강건했다는 것을 증명해 주는 것이다. 그런데 정작 엘리자베스 1세가 이룬 가장 큰 일은 대 영국 제국의 국교회의 확립인 것이었는데, 바로 대 영국 제국은 과거의 국교회의 문제점이 많았고 이를 바로잡아 교리를 제대로 세워야 한다고 주장했다.
결국 엘리자베스 1세가 가톨릭에서 대 영국 제국 국교회인 성공회로 돌아서 버렸다. 그런데 이것을 노리고 대 영국 제국을 침략하려는 대제국이 있었으니, 바로 대 에스파냐 제국이었다. 당시 대 에스파냐 제국의 대천황은 펠리페 2세였고, 펠리페 2세는 가톨릭 교도이자 가톨릭을 고수하는 대천황이었다. 펠리페 2세는 이런 엘리자베스 1세를 대 영국 제국의 황좌에서 몰아내기 위한 음모를 꾸민다. 그 증거로 펠리페 2세는 대 영국 제국과 적대 관계에 있었던 스코틀랜드 제국의 대국후인 메리 스튜어트를 설득하여, 그녀가 대 영국 제국의 대천후의 자리에 오를 수 있게 몰래 도와주었다. 그러나 대 영국 제국은 이 음모를 알아챘고, 결국 메리 스튜어트를 포로로 붙잡아 사형시킴으로써 펠리페 2세의 작전은 일단 실패로 돌아갔다. 이 사건 이후로 대 영국 제국에서 가톨릭 교도와 칼뱅 교도 등 성공회의 교도가 아닌 자들은 큰 탄압을 받게 되고 만다.
이렇게 펠리페 2세의 작전이 실패로 끝나자, 결국 펠리페 2세는 머리끝까지 화가 나 대 영국 제국을 침공할 것을 계획한다. 당시 대 에스파냐 제국은 서양의 여러 제국들이 공포에 떨고 있었던 대 오스만 제국과의 레판토 전쟁에서 크게 이겼던 적이 있었다. 한 때 대 오스만 제국은 지중해를 독점하면서 서양의 여러 제국들의 무역을 방해하고 있었는데, 이것을 보다 못한 대 에스파냐 제국이 막강한 해군력으로 대 오스만 제국의 해군들을 모조리 무찔렀다! 결국 대 에스파냐 제국은 당시 경쟁 제국이었던 포르투갈 제국을 제치고 최대 강대국으로 거듭난다. 안 그래도 자신이 한참 잘 나가는 시기에 느닷없이 대 영국 제국이 개입하기 시작했던 것을 성가시게 여겼기 때문에 결국 대 영국 제국과의 전쟁을 선포하기 시작한다.
드디어 때가 되자, 펠리페 2세는 결국 자신이 전투 지휘를 하기로 맘먹고 자신이 이끄는 막강한 함대들을 이끌고 대 영국 제국으로 출진한다. 비록 대 영국 제국도 해군력이 상당히 막강했으나, 대 에스파냐 제국 역시 무시할 수 없는 강력한 상대였다. 엘리자베스 1세는 자신의 대제국을 지키고 대 에스파냐 제국을 무찌르기 위해서 온갖 작전들을 세워나가기 시작한다. 그 증거로 자신의 대신이자 대장군인 프랜시스 드레이크에게 군대 통수권을 넘겨주면서 대 에스파냐 제국을 무찌르라고 말했다. 프랜시스 드레이크는 용감했고 또한 머리도 똑똑해서 군대을 제대로 이끌어나갔다. 드디어 1588년 대 에스파냐 제국의 무적 함대는 식민지인 벨기에 제국의 병력들과 합세하여, 대 영국 제국을 향해서 출진했다! 대 영국 제국도 무적 함대를 투입시켜 전쟁에 대비하려 했으나, 사실 대 영국 제국의 무적 함대는 대부분 건설 중에 있었고 그나마 쓸 만한 함대는 거의 없었다. 결국 대 영국 제국은 멸망의 위기에 봉착하기 시작했다.
그런데 대 오스만 제국을 무찔렀던 대 에스파냐 제국의 무적 함대는 프랜시스 드레이크가 지휘하는 대 영국 제국의 무적 함대에 크게 패하고 말았다. 이유는 대 영국 제국의 무적 함대는 아직 규모는 작았지만, 속력이 매우 빨랐고 거기다가 사정거리가 긴 대포가 있었기 때문이었다. 게다가 대 영국 제국 근처의 바다에서 벌어진 전쟁이라 애초부터 지리를 잘 알고 있었던 대 영국 제국이 크게 이길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게다가 대 영국 제국은 자신의 동맹국인 네덜란드 제국과 연합하여 대 에스파냐 제국의 무적 함대를 무찔렀기 때문에 이런 통쾌한 승리를 거둘 수 있었던 것이다! 결국 대 에스파냐 제국의 무적 함대는 대 영국 제국과의 전쟁에서 패배하고 난 이후, 재수 없게 폭풍우를 만나 추가적인 피해를 입고 결국 대제국으로 귀환하고 말았다. 이후 바다의 패권은 대 에스파냐 제국에서 대 영국 제국으로 넘어가기 시작한다.
근대
[+/-]대제국의 위기와 대의회의 등장
[+/-]이런 대 영국 제국에도 거대한 폭풍이 몰아치기 시작했다. 절대 군주제가 점점 쇠퇴해 나가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1603년 대 영국 제국의 새로운 대천황인 제임스 1세가 황좌의 자리에 올랐다. 그런데 귀족들과 평민들과 노예들의 불만이 엄청 많았는데, 바로 제임스 1세는 스코틀랜드 제국의 출신이었기 때문이었다. 본래 제임스 1세는 스코틀랜드 제국에서 제임스 6세로 불리우며 스코틀랜드 제국의 대천왕으로 있었다가 대 영국 제국으로 왔기 때문이었다. 게다가 제임스 1세는 과거 스코틀랜드 제국의 대천왕 시절에 대 영국 제국의 대의회를 제대로 알지 못했다. 이제 대 영국 제국의 대의회는 과거 엘리자베스 1세 대천후의 절대 황권 시절에도 꾸준히 그 실력을 키워 왔던 중산층들이 중심이 되어가고 있었다. 대의회의 대신들은 이제 개혁적이며 진보적인 성격으로 변화되기 시작하였다. 즉 이들은 재산과 지위를 부모에게서 물려받은 것이 아닌, 스스로 노력을 하여 부를 쌓은 사람들인 청교도인들이었기 때문이었다. 그런 만큼 이들은 새로운 대천황이 부임할 때부터 은근히 불만이 쌓여가기 시작했던 것이다. 이런 중산층과 그들의 대표자인 대의회의 대신들의 불만을 전혀 몰랐던 제임스 1세는 여전히 절대적인 황권을 유지하기를 원했고, 끝내 이것이 대천황과 대의회 사이에 피할 수 없는 충돌의 원인이 되어버렸다.
아무튼 대 영국 제국의 대천황의 자리에 오른 제임스 1세는 정치를 하는 과정에서 큰 장애물을 발견했다. 그것은 바로 대 영국 제국의 재산이 모자랐다는 점이었고, 끝내 제임스 1세는 대신들과 협약을 하여 대의회를 열었다.(대 영국 제국은 1215년 존 대천황이 마그나 카르타에 서명함으로써, 세금을 거두기 위해서는 대의회의 승인을 받아야 했기 때문이었다.) 이것이 대 영국 제국에서 첫 번째로 대의회가 열렸던 것이며, 대신들은 대천황에게 세금을 바칠 것을 맹세했다. 그 대신 대 영국 제국의 성직자들의 태도는 매우 불량했고 재산을 모으기에 정신이 팔려 교회의 기강이 무너지고 있다는 것을 말했다. 따라서 대신들은 대천황의 요구를 들어주는 대신 부패한 성직자들을 감독하고 감시할 권한을 달라고 요청했다. 그런데 제임스 1세는 사실 절대 황정을 추구하는 사람이었기 때문에 대신들의 의견에 절대적으로 반대했고, 결국 대천황과 대의회의 화합은 처음부터 실패로 돌아가고 말았다.
그런데 1605년 가톨릭 교도들이 황궁 안의 상원 대의회 지하실에 대천황과 성공회 중심인 대의원들을 폭탄으로 암살하려던 계획이 있었다! 다행히 이 계획은 실패로 끝났지만, 이를 처리하기 위해서 제임스 1세는 또다시 두 번째 의회를 소집했다. 이번에는 다행히 공동의 적인 가톨릭 교도들의 탄압을 위해서 대천황과 대의회는 서로 가까워지는 듯 했다. 그러나 대천황과 대의회의 새로운 충돌은 사소한 것에서부터 시작되고 말았는데.
제임스 1세는 당시 상인이었던 존 베이트가 아직 대 영국 제국에 없는 새 상품들을 이탈리아 제국의 베네치아 광역시로부터 수입했다고 대신들로부터 보고를 받았다. 그런 상품들이라면 보통 상품에 매기는 수입 관세만으로는 전혀 해결될 일이 아니었음을 알고, 제임스 1세는 그 상품들에 특별 소비세에다 부가 가치세에다 특수 물품 관세까지 붙여버렸다. 제임스 1세가 마구 세금을 매기다보니 존 베이트는 법으로 가리기 위해서 이에 대한 재판을 신청했다. 놀랍게도 대법원은 대천황이 옳다는 판결을 내렸고, 이에 대천황은 마음껏 세금을 마구 거두어도 법에 전혀 어긋나지 않는 상황이 되어버렸다. 대천황이 마음껏 새로운 수입 관세 목록을 발표하다보니 대의회에서는 들고 일어났다. 대의원들 중에 대부분이 상인 출신들이 많았기 때문이었다.
권리 청원 및 청도교 혁명
[+/-]제임스 1세의 첫 번째 아들이자 황태자인 찰스 1세가 대천황의 자리에 올랐다. 하지만 찰스 1세는 독재 정치를 시행했기 때문에, 백성들의 삶이 어려워졌고 급기야는 반란이 일어나기 시작했다. 게다가 찰스 1세의 아내이자 대 영국 제국의 대천후는 대 프랑스 제국의 대천황인 루이 13세의 여동생인 앙리에트 마리였다.(대 영국 제국과 대 프랑스 제국은 서로 원수지간이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대 영국 제국의 대국민들은 크게 실망했고, 대의회 마저도 찰스 1세를 만만하게 보았다. 대의회는 찰스 1세에게 필요한 돈도 내놓지 않았고 대천황을 마구 비난했다. 그래서 찰스 1세 시대의 대 영국 제국의 재정은 심각하게 나빠졌다. 거기다가 대 영국 제국은 30년 전쟁에 깊숙이 말려들게 되었고, 전쟁 비용을 마련하지 못하게 된 찰스 1세는 1628년 대의회를 소집하였다. 그러나 대의회의 모든 대신들은 대천황에게 불만을 품고 있었기 때문에 결코 대천황에게 돈을 마련하지 않으려고 하였다. 이에 찰스 1세는 서로 합의해서 이 사태를 해결하기로 했고, 대신들은 대천황의 뜻에 따라 돈을 마련해 주기로 하였다. 그 대신 대신들은 대국민을 대표하여 권리 청원을 요구했다. 이 권리 청원이란 대의회의 동의 없이 세금을 매기지 아니하며, 분명한 이유 없이 대국민들을 체포하거나 가두지 아니하며, 군대를 민가에 숙박시키는 민폐를 없애야 한다는 내용이었다. 처음에 찰스 1세는 엄청 반대를 하였으나, 돈이 없어 재정난이 심각해지자 할 수 없이 찰스 1세는 권리 청원에 서명을 하고 말았다.(이 권리 청원은 과거 1215년 마그나 카르타 이래 대 영국 제국의 가장 중요한 기본법이 되었다.)
일이 이렇게 되자, 대 영국 제국의 모든 교회들은 종을 울려 황권으로부터 빼앗은 대국민의 기본 권리를 축하하기 시작했고, 급기야는 민주화를 강력히 시행함으로써 황권 독재를 타도할 것을 다짐했다. 그런데 이 권리 청원으로 대천황의 힘을 꺾은 대의회는 모든 공격의 화살을 대천황이 가장 아끼는 대신인 버킹엄 공에게 돌려버렸다. 버킴엄 공은 찰스 1세가 황태자 시절이었을 때 둘도 없는 단짝으로, 찰스 1세는 대제국의 모든 일을 그와 상의해서 결정했을 정도였다. 그런 찰스 1세는 자신의 절친한 친구인 버킹엄 공을 구하기 위해서 대의회를 강제로 해산시켰고, 이에 대신들은 가톨릭 교도들로 하여금 버킹엄 공을 죽이라고 부추겼다. 끝내 버킹엄 공은 어떤 가톨릭 신자에 의해 죽고 말았다.
그리고 1629년 다시 찰스 1세에 의해서 대의회가 열렸는데, 비록 찰스 1세가 독실한 성공회 교도였지만, 찰스 1세가 앙리에트 대천후와 결혼할 때 약속한 대로 가톨릭을 금하지 않겠다는 결정을 내리기 위한 것이었다. 두말할 것도 없이 대의회는 심한 반대를 하면서 대천황과 정부를 비난하였고, 그 중 가장 심하게 항의한 자는 처음으로 대의회 의원에 당선된 올리버 크롬웰이라는 자였다. 대천황이 참석한 대의회는 걷잡을 수 없는 혼란에 빠졌고, 찰스 1세는 이 사태를 종결하기 위해서 강제로 대의회를 해산시키려고 하였다. 하지만 대신들의 비난이 더욱 거세졌고, 대신들은 대국민들을 대표하여 가톨릭으로 종교를 바꾸는 사람들과 가톨릭으로 바꿀 것을 요구하는 사람들과 대의회의 승인 없이 세금을 올리는 것을 요구하는 사람들과 그 세금을 바친 자들을 모두 대 영국 제국의 적으로 규정하기로 나섰다! 결국 찰스 1세는 머리 끝까지 화가 나서 대 영국 제국에 대의회는 영원히 없을 것이라고 선언하고 대의회를 폐지시켰다.
그로부터 11년 동안 찰스 1세는 대의회 없이 외롭고 괴롭게 대 영국 제국을 통치해왔다. 하지만 스코틀랜드의 반란으로 1640년 다시 대의회를 소집할 수 밖에 없었다. 찰스 1세는 대신들과의 단합을 통해서 잠시나마 서로 미워하는 마음을 억누르고 스코틀랜드의 군대를 무찌를 것을 호소했다. 하지만 대신들은 끝내 대천황의 호소를 거부했고, 대천황은 3주 만에 또 대의회를 해산시켜버렸는데 이를 '단기 대의회'라고 말한다. 그 동안 스코틀랜드의 군대는 승승장구하게 계속 대 영국 제국의 영토를 침략해왔고, 결국 또다시 찰스 1세는 1640년에 다시 대의회를 소집하였다. 이 대의회는 1653년까지 계속되어 '장기 대의회'라고 불린다. 대의회는 열리자마자 대신들의 과격한 행동부터 시작하여 대천황과 그와 가까운 대신들을 잡아 가두거나 사형에 처했다. 급기야는 대천황의 권력을 행사하기 위한 고등 법원과 성실청을 없애버렸다. 특히 청교도인 존 핌을 지도자로 하는 대의회는 찰스 1세로서는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는 요구를 들고 나서기까지 하는데.
존 핌은 이제 더 이상 대천황이 대제국의 일을 맡길 수 없다는 형편에 이르렀다고 주장했고, 대의회는 대천황에게 대의회로 하여금 국정을 살필 수 있게 하여 제국의 살림을 속속들이 감시 및 감독할 수 있는 권리를 주라고 강력히 주장했다. 또한 대천황의 소집이 없더라도 3년을 주기로 한 번은 대의회가 열릴 수 있게 해야 하며, 대천황은 대의회의 승인 없이 대의회를 해산시키거나 정지시킬 수 없다고 말했다. 이에 화가 난 찰스 1세는 군대를 이끌고 대의회에 직접 출격했다! 찰스 1세는 지금 제국이 어려운 상황에 빠져 있는데 그 따위 요구나 하고 있는 대신들을 강하게 욕했다. 대신들이야말로 비겁한 반역자이며 적에게 제국을 팔아 넘기려는 자들이니, 조국과 황관의 이름으로 대신들을 체포하려고 나섰다. 하지만 대의회의 권력도 막강했는데, 바로 대천황의 권한으로는 절대 대국민들의 대표를 체포할 수 없다는 것을 밝히고, 정당한 대 영국 제국의 대국민들의 요구를 무력으로 억누르려고 하는 대천황이 오히려 대 영국 제국의 적이라고 규명했다. 아울러 대천황이 무력으로 자신의 지위를 지키고 요구를 이행시키려고 한다면, 자신들도 무력으로 이에 맞설 정당한 권리가 있다는 것을 밝혔다! 이것이 황당파(皇黨派)와 의회파(議會派) 사이에서 8년이나 되는 전쟁이 시작되었으니, 의회파의 중심 세력이 산업 자본가들과 혁명적인 지주들로 이루어진 청교도였으므로 이것을 청도교 혁명이라고 불린다.
1642년에 시작된 황당파와 의회파의 전쟁은 처음에는 황당파가 절대적으로 우세했다. 하지만 크롬웰이 지휘하는 철기군의 대활약에 의해서 전세는 역전되기 시작하는데, 크롬웰은 1645년 네이즈비 전투에서 대천황의 군대를 무찔러 대세를 크게 바꾸었다. 이 전쟁은 결국 크롬웰의 의회파가 승리를 거머쥐었고, 찰스 1세는 스코틀랜드 제국으로 도망쳤다가 결국 붙잡혀 포로가 되어 의회파의 손에 넘겨지고 말았다. 1649년 135명의 대신들이 황궁의 재판정으로 모여 심판관이 있는 자리에서 찰스 1세에 대한 재판이 시작되었다. 재판관들은 대천황 찰스 1세를 반란죄로 고발했고, 대의회와 대국민들을 상대로 전쟁을 일으켰다고 주장했다. 심지어는 찰스 1세를 폭군이자 반역자며 살인자며 대 영국 제국의 적이라고 규정해버렸다! 그러나 찰스 1세는 이 재판이 무효라고 주장하면서, 자신이 아직도 합법적이며 당당한 대 영국 제국의 대천황임을 잊지 말라고 경고했다. 게다가 대의회 의원들이라도 틀림없는 대 영국 제국의 대신들이거늘, 대신들이 대천황을 상대로 전쟁하며 재판을 하는 것이 반란이라고까지 말했다. 어쨌거나 1주일 뒤에 찰스 1세에 대한 판결이 내려졌다. 그런데 놀랍게도 사형 판결에 서명한 사람들은 크롬웰을 비롯한 59명 뿐이었지만, 사형 선고가 확정되었다는 것이다. 이는 대신들이 대천황에 대한 불만이 컸음을 증명해주는 것이다.
마침내 1649년 찰스 1세가 사형장에 올랐다. 세계에서 처음으로 대천황이 대국민들에 의해서 재판을 받고 사형을 당하게 되는 사건이기도 했다. 죽기 직전에 찰스 1세는 자신은 오로지 대제국과 대국민들을 위해서 그 긴 세월을 오랫동안 싸워 왔다고 주장했고, 앞으로의 후손들이 대천황 찰스 1세는 정당했었고 지금의 대 영국 제국은 역사에서 가장 큰 오류를 범했노라고 합리화했다. 그리고 찰스 1세가 단두대의 칼날에 의해 목이 잘려 나가는 순간, 런던 특별시에서는 끔찍한 천둥 번개가 하루 종일 쳤다고 기록되기도 했다.
공화정 시대와 황정 복고
[+/-]1649년에 대의회는 황정을 폐지하고 공화정을 선포했다. 그렇지만 정권을 쥔 대의회가 여러 파벌로 나뉘어 정치 싸움이 계속되어 혼란스러워졌다. 이런 혼란을 바로잡은 사람은 크롬웰로 1653년에 대의회를 강제로 해산시켰고, 결국 1640년 이래 계속된 장기 대의회는 막을 내리고 말았다. 크롬웰은 호국경의 자리에 올라서 철저한 청교도적인 독재 정치를 시작한다. 그 증거로 극장은 모두 문을 닫고 음악과 미술과 문학 등의 예술은 종교적인 것만이 허용되었으며 가톨릭 교는 철저히 금지되었다. 그러는 한편 크롬웰은 자신의 정권을 계속 유지하기 위해서 부하들을 시켜 대국민들을 몰래 감시하고 엄한 처벌을 강행하기까지 했다. 결과적으로 세금은 몇 배나 무거워졌으며, 대제국의 재산은 엄청나게 늘었지만 대국민들의 불평도 그만큼 높아져 갔다. 게다가 크롬웰은 앞서 말했듯이 자신의 정권을 계속 유지하려고 선거에 나서는 자격마저 엄격히 정해버렸기 때문에, 대국민들이 정치에 참가할 기회는 더욱 적어져 버렸다.
비록 이것이 신앙심과 애국심에서 비롯되었다고는 하지만 크롬웰의 독재 정치는 대국민들의 마음을 멀어지게 했다. 마침내 1658년 크롬웰이 사망할 때 이미 모든 대국민들은 그의 적으로 변해버렸다. 하지만 크롬웰도 대 영국 제국을 위해서 많은 공헌을 했는데, 그 증거로 크롬웰은 청교도였기 때문에 상업과 공업의 발전에 엄청난 노력을 하여 대 영국 제국의 국력을 크게 키우는 데 성공했다. 게다가 1651년에 크롬웰은 항해 조례를 발표함으로써 네덜란드 제국과 충돌했다. 결국 네덜란드 제국과 전쟁을 시작했는데 대 영국 제국이 네덜란드 제국을 무찌름으로써 대 영국 제국이 바다를 제패하여 세계의 상권을 장악하고 최대의 강대국으로 발돋움하는데 큰 공을 세우기도 했다. 어쨌거나 크롬웰은 자신의 첫 번째 아들을 호국경으로 정하고 세상을 떠났으나, 대국민들의 거센 반발로 결국 6개월만에 그만두고 말았다. 결국 대 영국 제국은 다시 황정으로 돌아가 버리고 마는데.
1660년 찰스 1세의 첫 번째 황태자인 찰스 2세가 대 영국 제국의 대천황의 자리에 오른다. 대 영국 제국의 대국민들은 크롬웰의 독재 정치를 매우 싫어했고, 대국민들이 전통적으로 섬기던 대천황을 원했다. 크롬웰을 피해서 외국으로 망명했던 찰스 2세는 대국민들의 지지에 힘입어 다시 런던 특별시로 돌아왔다. 찰스 2세는 오랜 외국 생활로 새로운 세계를 경험한 현명한 대천황이었다. 찰스 2세는 이제 대국민들의 대화합의 시대가 왔다고 말하며, 과거 크롬웰의 독재 정치를 강하게 비판했다. 찰스 2세는 다시는 이런 비극이 일어나지 않게 정치적인 보복이 사라져야 하며, 대화와 타협으로 난국을 개척해 나가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제는 대천황과 대의회가 서로 합심하여 대제국을 발전시켜야 한다고 주장하자, 대의회의 대신들은 대천황을 절대적으로 따를 것을 맹세했다.
하지만 찰스 2세에게는 해결해야 할 문제가 있었는데, 바로 부황 찰스 1세 사형 사건만큼은 분명히 짚고 넘어가야 한다고 주장했다. 찰스 2세는 대인배답게 지금까지의 모든 정치범에 대해서는 죄를 더 묻지 않기로 맹세했지만, 부황 살해에 나선 주모자인 크롬웰만큼은 엄중히 처벌하겠노라고 말했다. 결국 찰스 1세 사형에 서명한 59명 가운데 주모자였던 9명을 교수형에 처하고, 크롬웰의 시체를 봉분 무덤에서 꺼내어 시체를 마구 자르고 오물을 쏟아붇고 심지어는 불에 태워 없애버리기까지 했다. 이렇게 정치적인 모든 정리는 끝이 났다. 이제 대 영국 제국은 평온을 되찾았고 황궁은 다시 화려한 생활을 시작하였으며, 극장도 다시 문을 열었으며 음악가와 미술가와 문학가는 다시 르네상스 시대처럼 활발히 활동하기 시작했다.
명예 혁명과 권리 장전
[+/-]1685년 찰스 2세가 세상을 떠나고 제임스 2세가 새로운 대 영국 제국의 대천황의 자리에 올랐다. 그런데 제임스 2세는 나이가 너무 많았고 무려 52세였다. 제임스 2세는 성격이 불같아 포악했고 화려한 겉치레를 상당히 좋아했다. 제임스 2세는 과거 대 프랑스 제국의 루이 14세처럼 절대 권력을 휘두르며 온갖 사치를 누리는 것이 목표라고 밝혔다. 하지만 대신들은 제임스 2세를 정신병자 취급했고, 급기야 제임스 2세가 다시 가톨릭 교도들에게 벼슬자리를 나눠주기 시작하자, 결국 대신들은 은밀히 폭동을 일으킬 준비를 하기 시작한다. 그러자 1685년 제임스 2세는 대놓고 대의회를 강제로 해산시키고 절대 군주로 군림하려 하였다. 결국 대천황을 보좌하는 보수당인 토리 당까지 제임스 2세의 실정에 등을 돌리고 말았다.
하지만 대신들은 곧바로 폭동을 일으키지는 않았는데, 바로 제임스 2세는 뒤를 이을 황태자가 없었다는 것이다. 비록 황태녀가 2명이나 있었지만 독실한 성공회 신도여서 아무 문제가 없었고, 게다가 황태녀 2명마저 모두 외국으로 시집을 갔기 때문에 그다지 큰 위협이 되지는 않았다.(첫 번째 황태녀인 메리는 네덜란드 제국에 있었고, 두 번째 황태녀인 앤은 덴마크 제국에 있었다.) 그런데 갑자기 대신들마저 믿기 어려운 놀라운 일이 벌어지기 시작하는데, 1688년 제임스 2세의 황태자가 태어난 것이었다! 결국 대신들은 본격적으로 그 동안 준비해 왔던 폭동을 일으킬 준비를 시작하려고 하는데.
곧 대 영국 제국의 대의회가 보낸 밀사가 도버 해협을 건너, 네덜란드 제국에 도착했다. 네덜란드 제국의 왕궁에는 당시 대천왕인 윌리엄 3세와 제임스 2세의 첫 번째 황태녀인 메리 2세가 대국후로 있었다. 윌리엄 3세는 밀사의 설명을 듣고, 대 영국 제국이 이제는 대천황이 대의회에 의해서 강제로 교체될 것 같은 위기에 처한 것을 알고 충격을 받았다. 처음에 윌리엄 3세는 대 영국 제국의 대천황의 자리에 올라달라는 부탁을 거절하였지만, 밀사는 대 영국 제국의 대천황의 자리에는 윌리엄 3세가 가장 적합하다고 강조했으며 또한 윌리엄 3세야말로 신교도이며 대국민들의 마음을 잘 파악할 수 있다고 칭찬하였다. 결국 윌리엄 3세는 고민 끝에 아내인 메리 2세와 같이 대 영국 제국으로 출발하였다.
1688년 11월 5일에 대 영국 제국에 도착한 윌리엄 3세와 메리 2세는 대천황인 제임스 2세가 대천황의 자리에 물러나도록 하였다. 결국 자신의 딸과 사위에게 배반을 당한 제임스 2세는 화가 나서 군대를 일으켜 그들을 모두 죽여버리려고 하였으나, 대신들은 이미 대 영국 제국의 대국민들은 대천황을 버렸다면서 소용이 없다고 말했고 대 프랑스 제국으로 망명할 것을 요구하였다. 결국 제임스 2세는 크게 후회하면서 대 프랑스 제국으로 망명하였고, 윌리엄 3세와 메리 2세는 각각 대 영국 제국의 대천황의 자리와 대천후의 자리에 올랐다. 다행히 이 과정에서 군대가 서로 피를 흘리지 않고 혁명을 이루어냈다고 하여 명예 혁명이라고 불린다.
무엇보다도 윌리엄 3세가 대 영국 제국의 대천황의 자리에 오른 이유는, 자신의 조국인 네덜란드 제국을 침공한 대 프랑스 제국을 무찌르기 위해서 대 영국 제국을 자신의 편으로 끌어들인 것이었다. 이렇게 윌리엄 3세와 메리 2세가 대천황과 대천후의 자리에 오르자마자, 대신들은 권리 선언을 제출하였다. 이는 대 영국 제국의 황관을 받은 윌리엄 3세와 메리 2세에 대한 것이었고, 대신들은 자신의 권리를 주장한 권리 선언을 제출하여 1689년 권리 장전으로 널리 보급시켰다.
권리 장전의 내용은 다음과 같은데, 우선 대의회의 승인 없이 헌법을 만들지도 없애지도 정지시키지도 못하며, 대의회의 승인 없이 멋대로 세금을 거두지 못하며, 황실 상비군을 갖지 못하며, 대의회가 대천황에게 요구하는 것은 헌법이며, 국회의원 선거는 자유롭게 시행되어야 하며, 대의회는 언론의 자유를 가짐과 동시에 대의회의 대회의는 자주 열려야 한다는 것을 강조하였다. 그리고 가장 중요한 것인 가톨릭 교도나 가톨릭 교도와 결혼한 자는 절대로 대 영국 제국의 황위를 계승하지 못한다는 것을 강조하였다. 윌리엄 3세와 메리 2세는 이제 대의회의 힘이 막강해진 것을 알고, 더 이상 대의회를 무력으로 제압하려고 하지 않았고 대신들의 의견대로 권리 장전을 받아들였다. 이렇게 대 영국 제국은 대천황의 권한을 줄여버린 입헌 군주국의 기반을 다지기 시작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