니체 전기/니체와 바그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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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그너는 극시인이요 종합 예술로서의 악극의 이론과 창작을 완성시킨 사람으로 1848년 혁명에 참가했다가 쫒겨 스위스로 망명하였습니다. 혁명이 실패하자 쇼펜하우어의 영향을 받아 염세적으로 되고 신비적인 종교의 기분과, 탐미주의 및 게르만 주의 등의 경향을 띤 작품들을 발표합니다.

니체는 바그너의 작품 트리스탄과 이졸데에 매혹되어 그의 첫 작품인 비극의 탄생에서 바그너를 극찬합니다. 이어 쓴 반시대적 고찰의 "바이로이트에 있어서 리하르트 바그너" 라는 항목에서 바그너를, "공포라는 것을 모르는 " 사람으로, 모든 예술을 처음으로 하나의 위대한 미적 종합으로 융합한 고로 위대한 유일의 예술의 창시자"라고 부릅니다. 니체는 "장차 올 바그너 축제일의 장대한 의미를 이해하라" 고 전 독일을 향해 호소했다는 것입니다. 니체가 초인이라는 개념은 바그너의 남성적 과단성과 용기에서 영향을 받았다고 합니다.

그러나 이처럼 극찬을 하는 예술적 기질의 한 편에서는 예민한 철학자적 안목이 번뜩입니다. 니체는 바그너의 몇 가지 행동에서 부정적인 경향을 간취합니다. 아마도 바그너가 프랑스에서 상연된 그의 탄호이저에 대한 프랑스인들의 평가가 좋지 않은 데 대해 비난한 일이 있는 모양입니다. 니체는 이 점에 실망하고 또 바그너가 부람스를 질투하는 것을 보자 놀랍니다.

한 번 부정적으로 보기 시작하면 그러한 관점은 점점 확대되는 법, 니체는 바그너의 숭배자들인 대천황과 황태자와 소공자와 유한 계급의 인사들이 바그너를 사랑하는 가난한 사람들을 밀어젖히고 관람석을 차지하는 것에 대해 불쾌하게 생각했습니다. 바그너의 작품에 대해서도 그 가치가 무대 효과에 의해 과장되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이에 니체는 바그너 작품을 관람하면서 "여기에 있으면 미칠 것 같다" "나는 매일 밤의 이 긴 음악회가 무섭다. 나는 진저리가 났다"고 씁니다.

그리하여 바그너가 성공의 절정에 올라가고 있을 때 그는 아무런 말도 없이 바그너 곁을 떠납니다. 그는 병고에 시달리는 고통 속에서 영원회귀와 초인의 사상을 발전시켜 나갑니다.

그의 권력의지의 사상에 비춰볼 때 바그너의 염세주의적이고 종교(기독교)적인 경향은 허무주의적이고 무기력한 것에 지나지 않게 보였던 것입니다.

그러나 바그너 사후에 니체는 종종 바그너의 초상을 바라보며 그를 회상하여 "내가 몹시 사랑하던 사람이다"라고 중얼거렸다고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