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민국의 역사
다음은 대한민국의 역사에 관한 내용이다. 대한민국은 옛날부터 역사가 많기로 유명한 대제국으로 알려져 있다. 비록 대한민국은 오랜 세월 동안 여러 번의 혼란을 겪어 왔으나, 전통적으로 유구한 문화들이 남아있다. 물론 대한민국인들은 자신의 역사에 대해 자랑스럽게 여긴다. 아울러 외국인들도 동양 역사에서 세 번째는 대한민국 역사라고 말할 정도로 대한민국은 역사가 깊다.
고고학적 자료
[+/-]기원 논쟁
[+/-]고대
[+/-]- 구석기
- 유명한 유적지로는 단양 상시리 바위그늘, 공주 석장리, 평남 상원 검은모루, 연천 전곡리, 청원 두루봉 동굴, 평양 덕천 승리산 동굴등이 있다. 석장리에서는 1964년에 남한에서는 처음으로 발견된 구석기유적이고 전곡리에서는 유럽식의 아슐리안계 주먹도끼가 아시아에서 최초로 발견됐다.
- 신석기
- 유명한 유적지로는 제주 고산리, 양양 오산리, 부산 동산동, 웅기 굴포리, 서울 암사동 등이 있다.
중세
[+/-]근세
[+/-]- 고려
근대
[+/-]- 조선
- 병자호란: 청나라가 조선이 친명 정책을 계속 유지해서 쳐들어옴 - 인조, 청나라에 항복/ 청나라 승리(청나라 태종이 삼전도비를 세웠다.)
현대
[+/-]신화적 자료
[+/-]고대
[+/-]- 선사 시대
- 한반도에 살던 구석기인은 보통 우리민족의 직접 조상으로 보지 않는다.
- 한민족은 만주와 한반도에 걸쳐 동이문화권을 형성했다.
- 한민족은 인종상으로 황인종, 언어학상으로 알타이어족에 속한다.
- 구석기
- 사용했던 석기에 따라 전기, 중기, 후기로 나뉘기도 한다.
- 석기로는 주먹도끼, 찍개, 찌르개, 슴베찌르개 등이 있다.
- 동굴이나 바위그늘, 막집 등에서 주로 살았다.
- 가족 단위로 무리를 이루어서 생활했다.
- 구석기 후기에 이르러서 조각품을 만들기도 했다.
- 잔석기
- 구석기에서 신석기로 넘어가는 기원전 1만년에서 8천년 사이의 시기를 일컬으며 작고 빠른 짐승을 잡기 위해 여러 개의 석기를 나무나 뼈에 꽂아 쓰는 이음도구를 주로 사용했다.
- 신석기
- 기원전 8천년에서 4천년 경에는 이른 민무늬토기와 덧무늬토기, 그 이후부터는 빗살무늬 토기가 주로 만들어졌다.
- 신석기 후기부터 농경이 시작됐으며 도구로는 가락바퀴(방추차)와 뼈바늘(골침)등이 있다.
- 주로 움집에서 살았으며 바닥은 둥그런 모양이였으며 4,5명이 살 정도의 규모였다.
- 움집의 중앙엔 화덕이 있었으며 남쪽으로 문이 있었고 식량 창고를 구석에 만들기도 했다.
- 농사에 영향을 끼치는 자연을 믿는 애니미즘, 무당을 믿는 샤머니즘, 동물을 믿는 토테미즘등을 믿었다.
- 탐라국
- 기원전 2337년 고을라에 의해 탐라국이 건국되었다.
- 왕치시대는 기원전 2337년에서 기원후 938년까지이다.
- 성주시대는 기원후 938년에서 1402년까지이다.
- 기원후 1402년 탐라 성주 고봉례가 인부를 근세조선의 왕(태종2년)에게 바쳐 근세조선에 병합하였다.
- 고조선
- 기원전 2333년 단군왕검에 의해 고조선이 건국됐다. 근세조선과 구분하기 위해 고조선이라 부른다.
- 다음은 삼국유사에 나오는 단군신화다. 옛날, 환인의 서자(庶子) 환웅이 인간세계를 다스리기를 원하였다. 그러자 아버지 환인이 인간세계를 굽어보니 삼위태백(三危太伯)이 인간을 유익하게 하기(弘益人間)에 적합한 곳으로 여겨지므로, 아들 환웅에게 천부인 3개를 주며 환웅으로 하여금 그곳으로 가 인간세계를 다스리는 것을 허락했다. 그러자 환웅이 풍백(風伯), 우사(雨師), 운사(雲師)를 비롯한 3,000명의 수하를 이끌고 태백산 정상 신단수(神壇樹) 아래로 내려와 그곳을 신시라 칭하며 다스리니 환웅천왕(桓雄天王)이라 불렸다. 그는 곡(穀, 곡식), 명(命, 목숨), 병(病, 질병), 형(刑, 징벌), 선함(善), 악함(惡) 등 360가지 일을 맡아 인간세계를 다스렸다.
그러자 같은 동굴에 사는 곰과 호랑이 한 마리가 환웅을 찾아와 인간이 되게 해달라고 늘 간청해왔다. 이들의 간청을 들은 환웅이 이들에게 신령(神靈)한 쑥 1자루와 마늘 20쪽을 주며 이것만 먹고 100일간 햇빛을 보지 않으면 사람이 될 수 있다고 하였다. 곰은 인내하고 근신하여 삼칠일(3×7, 21일) 만에 인간 여자로 변하였으나 호랑이는 참지 못하고 뛰쳐나가 사람이 되지 못했다. 웅녀는 자신과 혼인하는 사람이 없자 신단수 아래에서 환웅에게 아이 갖기를 기원했다. 그러자 환웅은 잠시 인간으로 변해 웅녀와 혼인하였다. 그 후 웅녀가 아들을 낳았는데, 그가 단군왕검이다. 왕검은 당고(唐高, 당고는 요임금을 말함) 즉위 50년 후인 경인년(요임금이 즉위한 때는 무진년으로 그 50년 후는 정사년임. 따라서 기록의 오류로 보임)에 평양에 도읍하고 국호를 조선이라 했다. 훗날 도읍지를 백악산〔白岳山, 또는 궁홀산(弓忽山), 금미달(今彌達)이라고도 함〕 아래 아사달로 옮겼다. 단군은 이후 1,500년간 조선을 다스리고 주나라 무왕(武王, 삼국유사에는 고려 혜종의 이름인 武 대신 虎로 표기됨) 즉위년에 기자를 조선 왕으로 봉하고 자신은 장당경(藏唐京)으로 옮겨갔다가 뒷날 아사달로 돌아와 산신이 되었는데 그때 단군의 나이 1,908세였다.
- 단군신화를 통해 고조선이 농경생활을 바탕으로 세워진 나라란 점, 홍익인간의 이념, 토테미즘을 믿는 사회, 계급의 분화 등을 알 수 있다.
- 8조법에는 3개 조항만이 전해져오는데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 사람을 죽인 자는 사형에 처한다.
- 상해를 입힌 자는 곡물로 배상한다.
- 도둑질한 자는 노비로 삼되 이를 면하려면 50만전을 내야 한다.
- 고조선은 기원전 2333년대 경부터 청동기문화를 배경으로 철기 문화를 수용하면서 요하, 대동강, 만주 일대에서 성장했고 춘추전국의 여러 나라와도 활발히 교류했다.
- 기자조선
- 기자조선(箕子朝鮮, 기원전 1175년? ~ 기원전 1083년?)은 기자(箕子)는 상(商)나라의 왕족이며, 상(商)나라가 주(周)나라에게 망한 후 단군조선에 망명 후 조선의 왕이 되었다.
- 위만조선
- 전국 시대(기원전 403년 ~ 221년) 이후의 혼란으로 그곳의 사람들이 조선으로 많이 왔는데 그 시기에 위만(衛滿)은 천여명의 무리를 이끌고 연(燕)에서 이주했다. 그러나 연(燕)에 살던 고조선 사람이라는 의견도 있다.
- 준왕(準王)의 신뢰를 얻어 서쪽 변방을 지키다 연(燕)나라에서 망명한 세력을 규합하여 기원전 194년 왕검성에 쳐들어가 준왕(準王)을 몰아내고 스스로 왕이 됐다.
- 이후 지리적인 이점을 이용하여 동예나 진(辰)이 한(漢)과 직접 교역하는 것을 막고 중계무역으로서 이득을 얻었으며 이는 한과의 갈등을 초대하여 한이 조선에 침략하는 계기가 됐다.
- 멸망
- 한(漢)나라는 기원전 109년 위만조선을 침략했고, 위만조선에서는 우거를 중심으로 1년간 싸웠으나 내분으로 기원전 108년 왕검성이 함락됐다.
- 한사군
- 한(漢)은 전후(戰後) 조선의 일부 지역에 4군을 설치했으나 강력한 저항으로 약화되다 결국 고구려의 공격으로 없어졌다.
- 진국
- 진국(辰國, 기원전 194년 ~ 101년)은 준왕(準王)이 세운 나라이며, 삼한(三韓)의 전신의 나라이다.
- 낙랑국
- 삼한三韓 시대
- 고조선이 멸망한 이후 만주와 한반도에 걸쳐서 부여, 고구려, 삼한(마한, 진한, 변한), 동예, 옥저등의 나라가 세워졌다.
- 부여夫餘
- 기원전 2세기경 세워졌으며 1세기경부터 만주의 송화강유역의 평지를 중심으로 성장했다.
- 49년 중국식 왕호를 쓰고 중국과 외교관계를 맺으며 사신을 보냈다.
- 285년 선비족의 침략으로 쇠퇴했고 494년 고구려의 문자왕에 의해 편입됐다.
- 왕 아래에는 가축의 이름을 딴 마가, 우가, 저가, 구가와 대사자, 사자등을 뒀다.
- 4가는 각기 행정구역인 사출도(四出道)를 다스리며 왕이 다스리는 중앙과 합쳐 5부를 편성했다.
- 대가(大加)들은 왕을 제가회의에서 뽑기도 하고 자연재해가 일어나 흉년이 들면 왕을 사형시키기도 했다.
- 농경과 목축이 주된 산업이었고 말, 모피등이 유명했다.
- 영고迎鼓라는 제천행사가 12월에 열렸음.
- 왕이 죽으면 노비를 같이 묻는 순장이 있었음.
- 4대금법이라는 법률이 있는데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 살인자는 사형에 처해지고 가족은 노비로 삼음.
- 물건을 훔쳤을 땐 물건값의 12배를 배상.
- 간음한 자를 사형에 처함.
- 부녀의 투기를 사형에 처함.
- 고구려高句麗
- 기원전 37년 부여출신 주몽이 압록강의 지류인 동가강 유역의 졸본에 고구려를 건국했다.
- 5부족연맹체(계루부, 관노부, 소노부, 순노부, 절노부)로 태조왕 때부터 계루부에서 주도권을 행사했다.
- 혼인풍속으로 서옥제(결혼한 뒤 신부 집에 작은 집을 짓고 자식을 낳고 자라면 아내를 데리고 신랑집으로 가는 제도)가 있었다.
- 10월에 동맹이라는 제천행사를 했다.
- 옥저
- 오늘날의 함흥평야 일대에 있었다.
- 옥저에는 왕이 없고 읍락마다 읍군邑君, 삼로三老라는 군장이 있었다.
- 해산물이 풍부했고 농사가 잘되어 곡식이 많았으며 이를 고구려에 바쳤다.
- 혼인풍속으로 예부제(여자가 남자 집에서 자라고 남자가 예물을 치르고 결혼하는 제도)가 있었다.
- 두벌묻기(가족의 시체를 가매장했다가 나중에 뼈를 골라 가족공동묘에 안치했다.)가 있었다.
- 변방에 있어서 중국의 선진문화수용이 늦었으며 고구려의 압력으로 성장하지 못하고 고구려에 정복됐다.
- 동예
- 오늘날의 강원도 북부에 있었다.
- 왕은 없고 후, 읍군, 삼로 등의 군장이 있었다.
- 방직기술이 발달했고 단궁(나무 활), 과하마(키 작은 말)등이 유명했다.
- 매년 10월 무천(舞天)이라는 제천행사가 있었다.
- 같은 부족내에 결혼하지 않는 족외혼이 있었다.
- 타 부족의 영역에 침범하면 노비, 소, 말로 무는 책화가 있었다.
- 변방에 있어서 중국의 선진문화수용이 늦었으며 고구려의 압력으로 성장하지 못하고 고구려에 정복됐다.
- 삼한
- 고조선의 유이민이 대거 남하하며 철기문화가 토착문화와 합치며 발전했다.
- 마한의 목지국의 지배자가 진왕으로 추대되어 삼한의 세력을 쥐었다.
- 대족장은 신지, 견지등으로 소족장은 부례, 읍차등으로 불렸다.
- 신성한 지역인 소도(蘇塗)는 의례를 여는 곳으로 죄인이 여기에 도망가도 함부로 잡지 못했다.
- 마한
- 충청, 경기, 전라도에 54개의 나라가 있었는데 그 중 백제국이 마한을 합쳐서 백제로 발전시켰다.
- 진한
- 대구, 경주를 중심으로 12개의 나라가 있었는데 그 중 사로국이 진한을 합쳐서 신라로 발전시켰다.
- 변한
- 낙동강유역을 중심으로 12개의 나라가 있었는데 후에 가야로 발전했다.
- 철이 많이 나와서 외국에 수출을 했다.
- 삼국 시대
- 고구려
- 태조왕(太祖王47~165,53~146재위):56년 옥저와 동예를 복속했고 부여를 공격했으며 요동과 살수에 진출했다.
- 고국천왕(故國川王179~197재위):부족적 전통의 5부를 행정적 5부로 개편하고 왕위 계승을 부자상속으로 바꿨으며 을파소의 건의로 진대법을 실시했다.
- 소수림왕(小獸林王371~384재위):372년 불교를 수용하고 태학을 세웠으며 373년 율령을 반포했다.
- 광개토대왕(廣開土王374~412,391~412재위):북으로는 여진과 거란을 정복하며 만주로, 서쪽으로는 선비족을 격파하며 요동으로 나아갔으며 남쪽으로 백제를 격파하여 임진강까지 닿기도 하였다. 또한 우리 역사 최초로 영락(永樂)이란 연호를 사용했다.
- 광개토대왕릉비:414년 장수왕이 아버지인 광개토대왕의 업적을 칭송하기 위해 세운 높이 약 6.39m의 비로 1775자가 새겨져 있으며 지금의 지린성 지안현 통구에 있다. 앞부분엔 주몽신화를 싣고 있으며 앞부분 일부와 가운데부분에 광개토대왕의 업적을 칭송하고 있으며 끝부분에는 수묘인에 대해 기록돼있다.
- 장수왕(長壽王394~491,412년음력10월~491년음력12월재위):주로 남진정책을 펼쳤는데 이는 427년 평양천도를 통해 대표되며 475년 백제의 수도 한성을 함락시켜 개로왕을 죽이고 이것들은 중원고구려비에 잘 반영됐다. 또한 지방의 5부를 정비하고 경당을 세웠다.
- 문자왕(文咨王491~519재위):494년 부여를 완전히 복속해서 고구려 최대의 판도를 형성했다.
- 영양왕(嬰陽王590~618재위):거듭된 수의 침입을 물리치고 이문진으로 하여금 유기 100권을 요약한 신집5권을 600년 편찬케 했다.
- 백제
- 고구려에서 온 온조(溫祚18~28재위)가 위례성을 중심으로 건국했다.
- 고이왕(古爾王234~286재위):한강 장악을 장악했고 관등제를 정비했으며 262년 율령을 반포했다.
- 근초고왕(近肖古王346~375재위):349년 평양성을 공격하고 369년 마한의 잔여세력을 정복하기도 했다. 또한 동진과 372년 수교를 맺고 가야, 왜와도 교류를 하며 요서, 산동, 구주에 진출하기도 했다. 부자상속체제를 확립했다.
- 침류왕(枕流王384~385재위):384년 불교를 수용했다.
- 비유왕(毗有王427~455재위):433년 신라의 눌지왕과 나제동맹을 맺었다.
- 문주왕(文周王475~477재위):475년 고구려 밀려 웅진(공주)로 천도했다.
- 동성왕(東城王479~501재위):493년 신라와 결혼동맹을 맺고 또한 탐라(제주도)를 복속했다.
- 신라
- 박혁거세가 기원전 57년 건국했다.
- 왕호 변천:박혁거세赫居世-거서간居西干(지배자란 뜻)/남해南解-차차웅次次雄(제사장, 무당이란 뜻)/유리儒理-이사금尼師今(연장자란 뜻)/내물奈勿-마립간麻立干(우두머리란 뜻)/지증왕 이후-왕
- 내물마립간(356~402재위):낙동강 동쪽의 진한지역을 거의 차지했으며 김씨의 왕위계승권을 확립했다. 또한 왜를 물리치는 과정에서 광개토대왕의 군대가 신라에 머무르며 고구려의 간섭을 받는 동안 고구려를 통해 중국의 문물을 수용했다.
- 눌지마립간(訥祗麻立干417~458재위):고구려의 장수왕에 대응하기 위해 433년백제의 비유왕과 나제동맹을 맺었으며 부자상속제를 확립했다.
- 소지마립간(炤知麻立干479~500재위):493년 백제의 동성왕과 결혼동맹을 맺고 경주에 시장을 열었으며 우역(공문서 전달, 관물 운송, 출장 관리 등의 업무를 담당하는 기관)을 설치했다.
- 지증왕(智證王437~514,500~514재위):503년 사로국의 국호를 신라로, 왕의 칭호를 마립간에서 왕으로 바꿨다. 또한 512년 우산국(울릉도)를 복속하고 순장을 금지했으며 상복을 도입했다.
- 법흥왕(法興王514~540재위):517년 병부(군사업무를 맏는 기구)를 설치하고 상대등제도를 마련했으며 530년 공복을 제정했다. 또한 율령을 반포하고 골품제를 정비하며 527년 불교공인, 건원建元이란 독자적 연호를 사용하며 신라 발전의 토대를 이뤄냈다.
- 가야
- 42년 김수로왕에 의해 건국됐다.
- 초기에는 김해의 금관가야(신라가 가락국을 병합 후의 국명이다.)가 주도했다가 400년전후로 고구려의 공격으로 그 땅이 낙동강 서쪽으로 축소되며 고령의 대가야가 가야를 주도했다.
- 가락국(금관가야)은 고신 연합국(광개토왕)의 주도하에 의해 병합되었다.
- 대가야는 신라에 의해 병합되었다.
- 후백제
- 후고구려
- 통일신라
중세
[+/-]- 고려
근세
[+/-]- 조선
- 태조 이성계는, 위화도 회군을 하고 도읍을 한양(서울)로 하여 1392년에 건국하였다.
- 임진왜란(1592년): 일본이 쳐들어옴 - 조명연합군 승리
- 병자호란: 청나라가 조선이 친명 정책을 계속 유지해서 쳐들어옴 - 인조, 청나라에 항복/ 청나라 승리(청나라 태종이 삼전도비를 세웠다.)
- 고종이 1897년 국호를 조선에서 대한제국으로 변경하였다.
근대
[+/-]- 대한제국
- 1884년 갑신정변
- 1895년 을미사변(일본군이 명성황후를 시해한 사건)
- 일제강점기
- 1910년, 한일 합방 조약으로 고종이 세운 대한제국이 망하였다.
현대
[+/-]- 군정기
- 1945년 8월 15일 광복 이후, 38도선 이북에서는 소비에트 연방군이 1948년 9월 9일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북한) 수립 이전까지, 38선 이남에서는 미국군이 1945년 9월 8일부터 1948년 8월 15일 대한민국(남한) 정부수립까지 한반도를 다스린 기간을 군정기라 부른다
- 대한민국
- 1945년, 일본이 제 2차 세계 대전에 미국의 원자 폭탄 공격에 의해 무조건 항복을 선언했다. 그 결과 대한민국 등 여러 일본의 식민지 국가들 모두 독립되었다.
- 남한
- 1950년 6월 25일, 6.25전쟁 / 대부분지역을 북한이 점령하지만 인천상륙작전으로 반격, 북한을 산악지역으로 몰아냈으나 중국이 북한을 도와서 1.4 후퇴 및 휴전(1953년 7월 27일)
- 1984년 아시안 게임
- 1988년 서울 올림픽
- 2002년 한일 월드컵
- 북한
- 소련에 의해 1948년 9월 9일 북한이 수립되었다.
- 1950년 6월 25일, 6.25전쟁 / 대부분지역을 북한이 점령하지만 인천상륙작전으로 반격, 북한을 산악지역으로 몰아냈으나 중국이 북한을 도와서 1.4 후퇴 및 휴전(1953년 7월 27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