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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의 역사

위키책, 위키책

다음은 미국의 역사에 관한 내용이다. 미국은 역사가 적으며 다른 민족들이 제국을 세워 만들었기 때문에, 역사적으로는 상당히 모자라며 유구한 문화들도 거의 없다. 하지만 미국은 근대 및 현대 시대에 세계에서 첫 번째로 크게 발전한 대제국이다. 정치와 경제와 문화 등이 골고루 발달되어 있으며, 지금도 세계에서 첫 번째로 강대국이자 선진국이다.

고고학적 자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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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원 논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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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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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 잉글랜드 식민지 시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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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 대 미국 제국은 독립적인 대제국을 형성한 상태가 아니었다. 즉 대 영국 제국의 식민지로써 대 영국 제국의 지배를 받으면서 살고 있었던 것이다. 대 영국 제국은 한정된 영토에 인구가 자꾸만 늘어나자 1620년에 결국 일부 대국민들을 강제적으로 아메리카 대륙으로 이주시키는 정책을 폈다. 그러나 아메리카 대륙으로 이주를 오는 사람들은 대부분 청교도인들이었고, 당시 대 영국 제국의 대천황이었던 찰스 제임스 스튜어트(Charles James Stuart)가 청교도를 강력히 탄압했기 때문에 결국 아메리카 대륙으로 이민을 가는 것이었다. 흔히 오늘날에도 대 미국 제국에는 똑똑하고 용감한 사람들이 넘쳐난다는 말은 아마도 이 청교도인들 덕분이 아닐까 싶다. 그만큼 청교도인들은 진보적이었고 유능한 사람들이 많았기 때문이었다.

처음 아메리카 대륙에 발을 디딘 청교도인 102명은 자유를 누리기 위해서 메이플라워 호(Mayflower 號)에 탑승하여 대서양을 거쳐 아메리카 대륙에 도착했다. 그 후에도 신앙의 자유를 찾아 건너오는 청교도의 숫자는 늘어났고 이들을 중심으로 뉴욕 특별주를 포함한 지역에 인구 25만의 뉴 잉글랜드 식민지가 개척되었고 1732년에는 동해안에 13개 주의 식민지가 건설되기까지에 이르렀다. 물론 이들은 대 영국 제국을 떠나기는 했지만, 여전히 대 영국 제국의 대천황을 통치자로 섬기고 있었으며 대 영국 제국과의 관계도 굳게 지켜나가고 있었다. 그런데 대 영국 제국은 뉴 잉글랜드 식민지를 탄압하는 정책을 펼쳐왔고 식민지를 업신여기는 정책을 펼쳤다. 결국 식민지 주민들은 대 영국 제국에 대한 불만이 쌓여가기 시작했다.

게다가 대 영국 제국은 대 프랑스 제국과 대 에스파냐 제국 등과의 전쟁으로 많은 돈을 쓰게 되었다. 결국 대 영국 제국은 그 돈을 뉴 잉글랜드 식민지에서 걷게 되었는데, 이 세금은 식민지에서 쓰는 모든 상품들을 대 영국 제국이 도맡아 대는 까닭에 더욱 비싸졌다. 그렇게 되자, 대 영국 제국이 아닌 다른 제국에서 상품을 몰래 사 오는 밀수꾼들이 늘어났고, 이들을 단속하며 식민지 지배를 굳건히 하기 위하여 대 영국 제국은 1만 명의 상비군을 두게 되었다. 거기다가 상비군의 유지비를 식민지에 떠맡기자 드디어 식민지 주민들의 불만이 폭발했다! 대 영국 제국은 식민지를 지키기 위한 군대이므로 보호받는 자가 그 비용을 물어야 한다고 주장했지만, 뉴 잉글랜드 식민지 주민들은 이에 맞서 상비군은 오히려 우리들을 억누르기 위한 군대인 것임을 알아채고 비용을 댈 수 없다고 주장했다.

이에 대 영국 제국의 대의회는 세금 수입을 늘리고 군대 유지비를 거두기 위해서 1765년 인지 조례(Stamp Act)를 통과시켰다. 이 인지 조례가 선포되자 식민지 주민들의 불만이 터져 거센 반대 운동이 벌어지고 말았다! 식민지 주민들은 반대 시위를 격렬하게 벌이며 인지를 불태워 버리는 등 적극적으로 대 영국 제국에 대해 투쟁을 하기 시작했다. 그러자 대 영국 제국의 대의회는 때마침 런던 특별시에 와 있는 뉴 잉글랜드 식민지의 펜실베이니아 광역주(Pennsylvania Metropolitan State)의 대의원인 벤저민 프랭클린(Benjamin Franklin)을 출석시켰다. 참고로 벤저민 프랭클린은 후에 아메리카 미합중국이 건국되고 조지 워싱턴 대천황의 한 단계 아래인 대천왕의 자리에 오르는 매우 유명한 인물로 거듭난다.

대 영국 제국의 대의원들은 벤저민 프랭클린에게 인지세를 낼 것을 강력히 요구했다. 이유인즉 뉴 잉글랜드 식민지는 인지세도 내지 않으면서 대 영국 제국의 군대가 식민지를 지켜 주기를 바란다는 것은 꿈도 꾸지 말라는 엄포였다. 하지만 벤저민 프랭클린도 이에 되받아쳤고 뉴 잉글랜드 식민지는 대 영국 제국의 전쟁을 위해서 25000명의 군대를 파견했고 수백만 파운드를 지원했다는 일을 상기시켰다. 이에 대 영국 제국의 대의원들은 인지세를 낮출 것을 맹세하고 앞으로 대 영국 제국을 위해서 더욱 힘쓸 것을 요구했지만, 벤저민 프랭클린은 인지세를 아예 내지 않겠다고 결심을 했다. 비록 벤저민 프랭클린은 뉴 잉글랜드 식민지의 주민들이 같은 대 영국 제국의 대천황 폐하의 백성으로써 세금을 내겠다고는 주장했지만, 뉴 잉글랜드 식민지에는 대 영국 제국의 대의회에 대표를 내보내지 못하고 있어 정치 참여를 봉쇄시킨다는 점을 지적했다. 대 영국 제국의 대국민들은 대의회에 그들의 대표인 대의원들을 마음껏 보내면서 뉴 잉글랜드 식민지에는 이러한 기회를 주지도 않고 무조건적으로 대 영국 제국이 뉴 잉글랜드 식민지를 탄압한다고 강력히 비판했다. 그러니까 같은 대제국의 대국민으로써 세금을 내야 한다면, 마땅히 뉴 잉글랜드 식민지도 대 영국 제국의 대의회에 대표를 내보낼 수 있게 해 달라고 강력히 요구했다.

처음에 대 영국 제국의 대의원들은 벤저민 프랭클린의 말을 듣고 수긍을 했다. 하지만 일부 대의원들은 아메리카 대륙에 대표를 보내도록 허용을 한다면, 언젠가는 대 영국 제국의 대표보다 그 숫자가 훨씬 많아져 곧 대 영국 제국이 아메리카 대륙의 지배를 받는 경고 형식의 주장을 하기 시작했다. 결국 대의원들은 아메리카 대륙에 대표를 보내지 않기로 강력히 주장했다. 결국 인지 조례에 대한 아메리카 대륙의 반대는 대 영국 제국의 상품인 불매 운동으로 번졌으며, 대 영국 제국의 상품 불매 운동이 번지자마자 밀수가 늘어 대 영국 제국 국내에서도 인지 조례에 반대하는 사람들이 늘어나기 시작한다.

결국 인지 조례는 1년 만인 1766년에 폐기되어버렸다. 하지만 그렇다고 대 영국 제국이 뉴 잉글랜드 식민지를 가만히 놔 둘 리가 없었다. 대 영국 제국은 뉴 잉글랜드 식민지로부터 무슨 수를 써서라도 세금을 거두려고 했고, 결국 1767년에 당시 대 영국 제국의 재무부 장관인 찰스 타운센드(Charles Townshend)는 새로운 법률인 타운센드 법(Townshend Act)을 대의회에 제출했다. 이 법률은 아메리카 대륙에 파는 모든 상품에 세금을 매기면 반발이 심각해질 것을 우려하여, 몇몇 품목에만 세금을 매기기로 결정하기로 했다. 유리와 염료와 종이와 차에만 세금을 매기고 밀수꾼에 대한 단속을 강화하여, 적발된 밀수꾼은 사형에 처하도록 하는 법을 만들었다. 이렇게 타운센드 법이 대 영국 제국의 대의회에 통과되었지만, 아메리카 대륙에서는 거센 반대 운동이 펼쳐지기 시작했다.

뉴 잉글랜드 식민지 주민들은 대 영국 제국의 유리와 염료와 종이와 차를 절대로 구매하지 않을 것을 맹세했고, 이렇게 새뮤얼 애덤스(Samuel Adams)를 중심으로 타운센드 법 반대 운동이 널리 펼쳐지기 시작했다. 이때는 뉴 잉글랜드 식민지 주민들과 대 영국 제국의 대국민들의 사이가 매우 나빠지기 시작했다.

드디어 시작된 충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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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 잉글랜드 식민지 중에서 대 영국 제국에 대해서 가장 불만을 갖고 있는 지역은 매사추세츠 광역주의 보스턴 광역시였다. 1770년 5월 5일 어떠한 작은 일 때문에 뉴 잉글랜드 식민지는 대 영국 제국과 한바탕 충돌을 겪어야 했다. 뉴 잉글랜드 식민지의 보스턴 광역시의 어떤 이발소의 조수 소년이 대 영국 제국의 군대가 이곳을 행군하는 것을 보고, 대 영국 제국의 군인들을 마구 놀리기 시작하였다. 당연히 대 영국 제국의 군인들은 화가 났고, 그 소년을 죽을 때까지 마구 구타하였다. 이 사건으로 인해서 뉴 잉글랜드 식민지의 대신민들은 대 영국 제국의 군대를 저지하기 시작하였고, 대 영국 제국의 군인들은 그들에게 무차별적으로 사격을 개시하였다!

이것이 바로 보스턴 사건으로 대표적인 희생자인 애턱스는 아메리카 미합중국의 독립 혁명을 개시하였다. 덕분에 타운센드 법은 폐지되었고, 뉴 잉글랜드 식민지는 대 영국 제국에 대해서 더욱 조직적으로 저항하기 시작하였다.

대 영국 제국과의 전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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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 세계 첫 번째 민주 공화국의 등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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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침내 조지 워싱턴이 이끄는 독립군은 1781년에 요크타운 전투에서 대 영국 제국의 군대를 무찌름으로써 항복을 받아내었고, 이로써 대 미국 제국의 독립 전쟁은 끝이 났다. 결국 1783년 대 영국 제국과 대 미국 제국은 대 프랑스 제국의 파리 특별시 근처에 있는 베르사유에서 평화 조약을 체결했고, 대 영국 제국은 대 미국 제국의 독립을 정식으로 승인했고 영토마저 떼 주었다. 이제 대 미국 제국은 누구의 간섭도 받지 않고 자유롭게 살 수 있는 한 개의 독립 대제국으로 탄생한 것이었다! 이제 대 미국 제국은 모든 대국민이 평등하며 자유로운 대제국으로 탄생했고, 삼권 분리의 원칙에 따라서 정부와 국회와 법원이 대제국의 일을 맡게 되었다. 이 땅의 주인이 된 자랑스러운 대국민들은 스스로 그들을 지배할 능력이 있음을 전 세계에 보여주었으며 드디어 전 세계에서 첫 번째로 민주 공화국이 되는 쾌거를 달성했다!

조지 워싱턴 대천황의 치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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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디어 조지 워싱턴이 1789년 수도인 뉴욕 특별시에서 아메리카 미합중국의 초대 대천황의 자리에 올랐다. 조지 워싱턴은 우선 대국민들의 삶을 안정시키기 위해서 온갖 노력을 다했다. 그러는 한편 군사력을 상당히 강화시켜, 진정으로 독립하고 대제국으로 인정받기 위한 작전들을 구사한다. 이러한 노력으로 대국민들은 자유롭고 평등하게 살아나갈 수 있었으며, 조지 워싱턴을 열렬히 찬양하기까지 했다.

그러나 역설적이게도 전 세계 첫 번째 민주 공화국의 초대 대천황인 조지 워싱턴은 대 영국 제국과 대 프랑스 제국 등 민주 공화국에 걸맞지 않게 대국민들 위에 군림하는 위엄 있는 대천황처럼 행동하였고, 심지어는 대국민들조차 조지 워싱턴을 대천황 폐하로 정중하게 맞이할 정도였다. 왜냐하면 아직 아메리카 미합중국은 민주 공화국으로 제대로 전환되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그래도 시간이 흐를수록 민주 공화국에 맞는 체제로 발전하기 시작했고, 조지 워싱턴 본인도 직접 솔선수범하여 대국민들을 위한 정치 체제와 경제 체제 등을 갖추려고 노력했다.

조지 워싱턴은 4년 중임의 대천황의 생활을 끝내고 8년이 지나자 다시 평범한 대국민으로 은퇴했다. 은퇴를 했어도 조지 워싱턴은 상당한 부자였는데, 그 증거로 조지 워싱턴의 집에는 10000명이 넘는 노예들과 크고 화려한 대저택과 엄청나게 넓은 땅을 소유하고 있었다.

현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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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메리카 미합중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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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화적 자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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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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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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