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양 정치사상사/플라톤
플라톤의 삶
[+/-]플라톤은 427년 저명한 아테네 가문에서 태어났다. 그의 어머니 페리치온은 아테네의 위대한 법률가 솔론의 후손이었다. 젊은 시절 소크라테스의 영향을 받았다. 고대의 전통에 따르면 플라톤은 원래 시인이 되려고 했다. 그는 아테네 극 대회에 참가하기 위해 극을 썼지만 소크라테스를 만났을 때 자신이 썼던 극을 불태웠다. 소크라테스가 플라톤에게 오랫동안 끼친 영향은 대화편에서 분명하다. 플라톤은 소크라테스가 죽은 지 오래 후에도 소크라테스의 입에 자신의 철학적 견해를 넣었다. 플라톤의 시적 재능은 그의 대화편에서 명백하다.
플라톤의 삶은 아테네의 쇠퇴기와 일치했다. 그의 탄생은 아테네의 권력과 영향력의 절정을 알린 페리클레스 시대 이후 불과 몇 년 만에 이루어졌다. 우리는 그의 젊음이 펠로폰네소스 전쟁에 의해 강하게 영향을 받았다고 추측할 수 있다. 그는 아테네 군에서 복무했을 것이다. 아테네가 스파르타와 동맹국들에게 함락되었을 때 아테네 민주주의는 스파르타의 지원을 받는 과두정치로 대체되었다. 제7서신에서 플라톤은 펠로폰네소스 전쟁이 끝나고 그가 점차 정치에 환멸을 느끼게 되면서 사건에 대한 그의 반응을 묘사한다.
고르기아스
[+/-]문학적 장치로서 대화의 매력은 저자가 자신의 모든 것을 헌신하지 않고 다양한 각도에서 아이디어를 고려할 수 있게 하고, 대화의 가장 "소크라테스적"인 플라톤은 이것을 최대한 활용한다는 것이다. 『고르기아스』는 아마도 380년경에 쓰여졌을 것이다. 유명한 웅변가 고르기아스로부터 그 제목을 따왔다.
고르기아스는 상류층 젊은이들에게 성공하도록 가르치는 교사로 자신을 보인다. 소크라테스는 고르기아스가 어떤 특별한 기술을 팔고 있는지 궁금해한다. 철학과 수사학의 본질에 대한 첫 번째 질문은 이렇다. 철학은 배관이나 자동차 정비와 같은 특별한 것에 관한 것이 아닌 것 같지만, 그 실무자들에게는 매우 중요한 것으로 보인다. 고르기아스는 철학보다는 수사학의 교사이다. 만약 그가 의학이나 목공과 같은 기술을 가르치고 있지 않다면, 천문학과 같은 과학을 가르치고 있지 않다면, 그는 어떤 수사학이 지식에 대한 지식인지를 설명할 필요가 있다.
고르기아스와의 토론이 끝날 때, 소크라테스는 수사학은 전혀 기술이 아니라고 말한다. 그것은 유용한 목적을 제공하지 않으며 인간의 존재를 돕는 아무것도 달성하지 못한다.
국가
[+/-]제1권
[+/-]소크라테스는 여신에게 기원을 드리고 새로 열린 축제를 구경하기 위해 글라우콘과 함께 페이라이에우스로 갔다. 그곳에서 그리스인들과 트라키아인들의 행렬을 보고 난 후, 기원과 구경을 마치고 아테나이 시내로 돌아가던 중, 폴레마르코스의 하인이 소크라테스를 불러 세운다. 곧 폴레마르코스와 그의 일행이 도착하고, 그들은 소크라테스에게 함께 남아 축제를 즐기자고 권한다. 아데이만토스는 밤에 열릴 말 탄 횃불 경주와 밤새 이어질 축제가 볼 만하다고 말하며 참여를 권유한다. 결국 소크라테스는 그들과 함께 남기로 한다.
소크라테스는 폴레마르코스와 함께 그의 집으로 가서, 리시아스, 에우티데모스, 트라시마코스, 카르만티데스, 클레이토폰 등 여러 인사들과 만난다. 그곳에서 폴레마르코스의 아버지 케팔로스를 오랜만에 만나 인사를 나눈다. 케팔로스는 나이 든 자신이 시내로 가기 어려우니, 소크라테스가 자주 찾아와 젊은이들과 함께 이야기해 달라고 부탁한다. 소크라테스는 연륜 있는 사람들의 경험을 듣는 것을 좋아한다며, 특히 노년이 어떤 시기인지 케팔로스의 견해를 듣고 싶다고 말한다.
케팔로스는 늙음이 괴롭다고 한탄하는 노인들과 달리, 노년은 육체적 욕망에서 벗어나 오히려 큰 평온을 주는 시기라고 말한다. 그는 소포클레스를 예로 들며, 성적 욕망이 사라지는 것을 해방처럼 여기는 사람도 있다고 소개한다. 케팔로스는 노년의 괴로움은 나이 때문이 아니라 사람의 성격과 삶의 자세 때문이라고 강조한다.
소크라테스는 케팔로스의 평온한 노년이 성격이 아니라 부 덕분이라는 일반의 견해를 언급하며 대화를 이어간다. 케팔로스는 재산이 도움이 되는 건 사실이나, 그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고 말한다. 그는 훌륭한 사람이어야 부든 빈궁이든 노년을 잘 이겨낼 수 있다고 강조하며, 자신은 상속받은 재산에 약간을 보태 자식들에게 물려주는 것으로 만족한다고 말한다. 이에 소크라테스는 자수성가한 사람들이 자기 돈을 지나치게 중시하는 경향이 있다며, 그들과의 교제는 피로하다고 덧붙인다. 케팔로스는 이에 동의한다.
소크라테스는 케팔로스에게 재물의 이득에 대해 묻고, 케팔로스는 재물이 사람을 도와주는 중요한 역할을 한다고 말한다. 특히 재물은 죽음을 앞두고 두려움과 후회를 없애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한다고 설명한다. 그러나 재물의 소유는 훌륭한 사람에게만 가치가 있다는 점을 강조하며, 도덕적이고 의로운 생활을 하는 사람에게 재물은 큰 도움이 된다고 말한다. 이에 소크라테스는 정의에 대한 의문을 제기하며, 재물과 정의의 관계에 대해 더 깊은 논의를 유도한다. 결국 폴레마르코스는 시모니데스를 따른다고 언급하며, 케팔로스는 제물을 바치러 나간다.
소크라테스는 폴레마르코스에게 시모니데스의 정의에 관한 말을 묻고, 폴레마르코스는 “각 사람에게 빌린 것을 되돌려주는 것”이 정의라고 주장한다. 소크라테스는 이를 의심하며, 실성한 사람에게는 빌린 것을 돌려주지 말아야 한다는 점을 들어 시모니데스의 정의에 다른 뜻이 있을 것이라고 언급한다. 폴레마르코스는 시모니데스가 친구에게 빌린 것은 좋은 일을 위한 것이며, 해로운 것은 빌리지 않는다고 설명한다. 소크라테스는 이를 바탕으로 “적에게서 빌린 것은 돌려주어야 한다”는 논의를 이어가며, 해로운 것을 빌린다면 그것이 정의에 맞는지 질문한다.
소크라테스는 시모니데스의 정의를 분석하며, 정의란 각자에게 알맞은 것을 되돌려주는 것이라고 설명한 시모니데스의 말을 비판적으로 파고든다. 그는 ‘빌린 것과 알맞은 것을 되돌려주는 기술’이 의술이나 요리술처럼 특정 기술로 정의될 수 있는지 묻는다. 폴레마르코스는 정의가 친구에게 좋은 일, 적에게 나쁜 일을 하는 것이라고 설명하고, 소크라테스는 이러한 정의가 실제 상황에서 평화와 상거래에서 쓸모가 있는지, 그리고 다양한 협동에서 정의가 어떻게 적용될 수 있는지 탐구한다.
결국 소크라테스는 정의가 항상 쓰일 수 있지만, 그 쓰임은 상황에 따라 다르고, 때로는 정의가 쓸모없는 경우도 있다는 점을 강조한다. 정의는 협동적이고 사회적인 맥락에서 중요하며, 필요할 때마다 그 적합성을 고민해야 한다는 결론에 도달한다.
이 대화에서는 정의에 대한 폴레마르코스의 개념을 탐구하고 있다. 처음에 그는 정의를 친구를 이롭게 하고 적을 해롭게 하는 것으로 정의했다. 그러나 소크라테스는 이 정의가 여러 면에서 모순적일 수 있음을 지적하며, 친구와 적을 잘못 판단할 수 있는 가능성을 설명합니다. 결국 폴레마르코스는 친구와 적의 정의를 다시 생각해야 한다고 결론짓습니다.
소크라테스는 정의가 “의롭다고 생각되는 사람”을 친구로, “나쁘다고 생각되는 사람”을 적으로 구분하는 것이 아닌, 실제로 의로운 사람을 친구로, 부정적인 행동을 하는 사람을 적으로 구분해야 한다고 제안한다. 이에 폴레마르코스는 소크라테스의 논리에 동의하며, 정의에 대한 새로운 개념을 받아들입니다.
결론적으로, 정의는 단순히 사람들의 생각이나 감정에 따른 것이 아니라, 실제로 의로운 사람을 친구로, 부정한 사람을 적으로 구분하는 기준에서 출발해야 한다는 점을 강조합니다. 이 대화에서 소크라테스는 정의가 무엇인지를 계속해서 탐구하고 있습니다. 폴레마르코스는 정의를 친구를 이롭게 하고 적을 해롭게 하는 것으로 정의했지만, 소크라테스는 이 정의가 잘못된 것임을 지적합니다. 그는 정의가 사람에게 해를 끼치는 것이 아니라, 사람을 더 나은 상태로 만드는 것이라고 주장합니다.
소크라테스는 다양한 예를 들어가며, 해를 끼치는 것이 그 대상에게 더 나쁘게 만든다고 설명합니다. 예를 들어, 말에게 해를 입히면 그 말은 더 나빠지고, 개에게 해를 입히면 그 개도 더 나빠집니다. 이는 사람에게도 마찬가지로 적용되며, 사람에게 해를 끼친다면 그 사람은 더 부정해진다고 말합니다.
또한, 소크라테스는 정의가 사람을 더 나은 사람으로 만드는 것이어야 한다고 주장하며, 의로운 사람은 해를 입히지 않으며, 정의는 절대로 사람에게 해를 끼치는 것이 아니라고 결론지었습니다. 그는 정의에 대한 잘못된 이해를 고쳐야 한다고 강조하며, 친구에게 이익을 주고 적에게 손해를 주는 것만을 정의로 생각하는 사람들에 대해 비판합니다.
결국, 정의는 단순히 이익과 손해를 주는 일이 아니라, 사람을 더 나은 존재로 만드는 것이며, 이는 “친구를 이롭게 하고 적을 해롭게 하는” 것과는 다르다고 소크라테스는 결론짓습니다.
제2권
[+/-]글라우콘은 소크라테스가 의로운 것이 부정한 것보다 더 좋다고 믿게 하려는 의도가 있는지 질문하며, 선의 개념을 세 가지 종류로 나누어 설명한다. 첫 번째는 그 자체로 좋고 결과도 좋은 것들, 두 번째는 그 자체로 좋고 결과도 좋은 것들, 세 번째는 괴롭지만 결과적으로 이로운 것이다. 글라우콘은 정의를 가장 아름다운 종류에 넣고 싶다고 말하지만, 많은 사람들은 정의를 괴로운 것들 중 하나로 간주한다고 지적합니다.
트라시마코스의 주장을 인용하며, 사람들이 정의를 부정적으로 바라보는 이유는 그가 정의를 비방하고 부정을 칭찬하기 때문이라고 말합니다. 정의의 본질과 기원에 대해 명확히 이해하고 싶어하며, 정의가 부정보다 낫다는 주장을 듣고 싶어 합니다. 트라시마코스의 주장을 통해, 사람들은 부정을 행하는 것이 좋고 부정을 당하는 것이 나쁘다고 생각하며, 이러한 관점에서 서로 부정행위를 피하기 위해 법률을 만들고 계약을 맺게 된다고 설명한다. 정의는 부정행위를 하지 않으면서도 부정을 당하지 않는 것의 중간 지점에 위치하며, 이는 부정행위를 할 수 있는 힘이 없는 사람들이 정의를 가치 있게 여기는 이유로 설명됩니다.
기게스의 이야기로 예를 들어, 그는 투명한 반지를 통해 남의 눈에 띄지 않게 되어 왕을 죽이고 왕위를 차지하게 되었다고 설명합니다. 만약 의로운 사람도 같은 반지를 끼게 된다면, 그도 부정한 행동을 할 가능성이 높아진다는 것이다. 이는 정의가 개인에게 항상 이로운 것이 아니라는 점을 강조하며, 사람들이 부정한 행동을 더 이롭게 여기는 경향이 있음을 지적합니다. 결국, 정의는 외부의 법률에 의해 억제되는 것이며, 사람들은 부정이 더 유리하다고 생각하게 될 것이라는 논지를 펼칩니다.
부정한 사람은 자신의 부정행위를 숨기고, 필요할 때는 이를 바로잡을 수 있는 능력을 가져야 하며, 설득력과 힘을 통해 자신의 부정함을 감출 수 있어야 한다고 설명합니다. 반면, 의로운 사람은 진정으로 선량하고 고귀한 인품을 지녀야 하며, 외적인 명예나 상이 아닌 진정한 정의를 추구해야 합니다. 이 두 사람을 비교함으로써, 정의의 진정한 가치와 행복이 어디에 있는지를 판단할 수 있는 기준을 마련하려고 합니다. 궁극적으로, 이 대조를 통해 정의와 부정의 극단에서 어느 쪽이 더 행복한지를 평가하려는 의도를 가지고 있습니다.
글라우콘과의 대화 중, 정의로운 사람과 부정한 사람의 삶을 비교하며 부정한 사람의 삶이 더 유리하다고 주장한다. 부정한 사람이 고통을 겪지 않고도 사회적 지위와 재산을 얻을 수 있으며, 심지어 신들에게도 더 많은 사랑과 혜택을 받을 수 있다. 그는 이러한 주장을 통해, 부정한 사람의 행실이 실제로는 더 많은 이익을 가져다주고, 사회에서 더 높은 평가를 받을 수 있다는 점을 강조한다. 결국, 그는 정의로운 삶이 부정한 삶보다 더 힘들고 불리하다..
글라우콘이 정의에 대한 찬양과 부정에 대한 비난을 이야기한 후, 그의 형 아데이만토스가 소크라테스에게 이 주제에 대해 더 깊이 논의할 것을 요청한다. 아데이만토스는 글라우콘의 주장이 정의의 본질을 충분히 설명하지 못했다고 지적하며, 정의가 가져다주는 명성과 그로 인해 얻는 이익에 대해 논의할 필요성을 강조합니다.
소크라테스는 사람들이 정의를 찬양하는 이유가 단순히 정의 자체가 아니라, 정의로 인해 얻는 사회적 명성과 물질적 이익 때문임을 설명합니다. 그는 신들이 의로운 사람들에게 주는 보상에 대한 고대 시인들의 언급을 인용하며, 의로운 삶이 가져오는 여러 가지 이익을 강조합니다. 그러나 그는 또한 부정한 사람들에게 내려지는 벌과 그들의 처벌에 대해서는 언급이 부족하다고 지적합니다.
많은 사람들이 정의와 절제가 아름답지만 힘들고 귀찮다고 여기고, 반면 부정과 방종은 즐겁고 쉽게 얻을 수 있다고 주장한니다. 또한, 나쁜 사람들도 돈이나 권력이 있으면 행복하다고 여기는 경향이 있으며, 그들은 약하고 가난한 사람들을 경시한다.
소크라테스는 신관과 점쟁이들이 부자들에게 자신들의 힘을 과시하며 제물이나 기도를 통해 신의 뜻을 바꿀 수 있다고 주장하는 모습을 비판한다. 또한, 악은 쉽게 얻을 수 있다는 점을 강조하며, 신들은 덕에 이르는 길이 험난하다고 경고합니다. 그는 호메로스의 예를 들어, 인간들이 신의 뜻을 바꿀 수 있다는 믿음이 잘못되었음을 지적합니다. 마지막으로, 사람들은 제물을 바치지 않으면 파멸이 기다리고 있다고 경고받으며, 이러한 신앙과 의식이 개인과 사회에 미치는 영향을 성찰합니다.
소크라테스는 사람들이 정의로운 삶을 살기 위해서는 외적인 평판이나 신의 처벌을 고려해야 한다고 말합니다. 그는 부정한 방법으로 이익을 얻는 것이 단기적으로는 유리할 수 있지만, 궁극적으로는 신의 심판을 피할 수 없다고 경고합니다. 또한, 젊은이들이 부정한 행위를 통해 얻은 이익을 정당화하려 할 때, 그들이 신의 존재를 믿거나 믿지 않는 것에 따라 그들의 선택이 달라질 수 있음을 지적합니다.
결국, 소크라테스는 젊은이들이 진정한 행복을 추구하기 위해서는 덕과 정의를 따르는 길을 선택해야 하며, 그 선택이 단순한 사회적 평가를 넘어 신의 도덕적 기준과 연결되어 있음을 강조합니다.
정의가 부정보다 더 우월하다는 주장을 하며, 사람들은 외부의 평판이나 보상 때문에 정의를 찬양하고 부정을 비난한다고 지적합니다. 그러나 그는 진정한 정의와 부정의 본질을 탐구해야 한다고 강조합니다.
정의가 그 자체로서 소유자에게 어떤 이익을 주는지를 보여주어야 하며, 부정이 소유자에게 어떤 해를 끼치는지를 명확히 해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이를 통해 정의가 단순히 외부의 인식이나 보상에 의존하지 않고, 그 자체로서 가치 있는 것임을 입증해야 한다고 강조합니다. 결국, 그는 정의가 인간의 본성과 영혼에 긍정적인 영향을 미치고, 부정은 그 반대의 영향을 미친다는 점을 명확히 하고자 합니다.
소크라테스는 그들이 부정이 정의보다 좋다고 믿지 않는 이유를 강조하며, 정의에 대한 깊은 이해를 위해서는 개인보다 더 큰 단위인 국가에서 정의를 탐구하는 것이 더 효과적일 것이라고 주장합니다. 그는 국가의 발생과 정의의 본질을 살펴보면 개인의 정의를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될 것이라고 말합니다. 아데이만토스는 소크라테스의 제안에 동의하며, 탐구를 계속 진행해 달라고 요청합니다. 이 대화는 정의의 본질을 탐구하는 과정의 복잡성과 중요성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주인공은 나라가 생기는 이유를 각 개인이 자급자족하기 어렵고 서로 협력해야 한다는 점에서 찾습니다. 사람들은 각자의 필요를 충족하기 위해 서로 다른 일을 하며 협동하게 되고, 이를 통해 공동체가 형성됩니다.
주인공은 생존에 필요한 기본적인 것들, 즉 양식, 주거, 의복 등을 마련하기 위해 다양한 직업이 필요하다고 주장합니다. 농부, 건축공, 직조공 등 여러 기술자들이 필요하며, 이들은 각각 자신의 전문 분야에서 일해야 더 효과적으로 작업을 수행할 수 있다고 강조합니다.
또한, 나라가 다른 나라와의 교역을 통해 필요한 물건을 수입하고 수출하기 위해서는 더 많은 인구와 다양한 기술자가 필요하다고 설명합니다. 이를 통해 무역상과 바다에서의 거래를 위한 인력도 필요하다는 점을 언급하며, 나라의 규모와 복잡성에 대한 이해를 깊게 합니다. 결론적으로, 나라의 형성과 운영에는 많은 사람들의 협력과 전문성이 필수적이라는 주장이 펼쳐집니다.
이 대화에서는 공동체와 국가의 형성, 상업의 역할, 그리고 정의에 대한 고찰이 이루어집니다. 소크라테스와 아데이만토스는 사람들이 서로의 필요를 충족하기 위해 물건을 교환하고, 이를 통해 장터와 돈이 생겨났다고 논의합니다. 장터에서 거래를 담당하는 상인과 일용직 노동자(날품팔이)의 존재가 국가 형성에 기여한다고 설명하며, 이들이 경제적 활동을 통해 공동체를 이루는 과정을 이야기합니다.
또한, 아데이만토스는 정의와 부정이 사람들 간의 필요에 개입할 수 있다고 언급하며, 소크라테스는 이 주제를 더 깊이 탐구할 것을 제안합니다. 마지막으로, 그들은 사람들이 농작물, 의복, 주거 등을 통해 기본적인 생활을 영위하며, 즐거움과 안전을 추구하는 모습을 그립니다. 이러한 논의는 정의가 어떻게 공동체의 필요와 연결되는지를 탐구하는 과정으로 이어집니다.
글라우콘은 소크라테스가 제안한 간단한 생활 방식에 대해 반찬이 없는 음식을 주는 것과 같다고 지적하며, 더 나은 생활을 위해 다양한 음식과 사치품이 필요하다고 주장합니다. 소크라테스는 이러한 사치가 국가의 필요를 증가시키고, 결국 더 많은 직업과 자원을 요구하게 될 것이라고 설명합니다. 두 사람은 결국, 단순한 생활에서 시작해 점점 더 복잡하고 사치스러운 사회로 발전하게 되는 과정을 논의하며, 이는 정의와 부정이 어떻게 발생하는지를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될 것이라고 결론짓습니다.
소크라테스는 목축과 경작을 위한 충분한 땅을 확보하기 위해 이웃의 땅을 빼앗으려는 욕망이 생기고, 이는 결국 전쟁으로 이어질 것이라고 말합니다. 그는 전쟁이 물욕에서 비롯된다는 점을 지적하며, 전쟁의 기술이 중요하다고 강조합니다. 또한, 전쟁을 잘 수행하기 위해서는 특정 기술에 전문화된 군인이 필요하다고 주장하며, 여러 직업을 동시에 수행하는 것이 전쟁 수행에 적합하지 않다고 설명합니다. 결국, 전문화된 훈련과 지식이 전쟁에서의 성공에 필수적이라는 결론에 이릅니다.
두 사람은 방위자가 갖추어야 할 신체적 특징과 영혼의 기백에 대해 이야기하며, 용감함과 순함이 동시에 필요한 복합적인 성격에 대해 고민합니다. 그러나 순한 본성과 기개 있는 본성이 상반된 특성이라는 점에서 좋은 방위자를 찾는 것이 어렵다는 점을 인식합니다. 결국, 그들은 다른 짐승들, 특히 혈통 좋은 개에서 보이는 성격에서 해결책을 찾을 수 있음을 깨닫고, 방위자에게서도 그러한 성격을 발견할 수 있을 것이라고 결론짓습니다.
주인공은 방위자가 기백뿐만 아니라 지혜의 사랑도 필요하다고 주장합니다. 그는 개의 행동을 예로 들어, 낯선 사람에게는 경계심을 보이지만 친숙한 사람에게는 반가움을 느끼는 본능이 지혜의 사랑을 나타낸다고 설명합니다. 이러한 본능이 친구와 적을 구분하는 데 도움이 되며, 이는 학문과 지혜를 사랑하는 것과 연결된다고 말합니다. 따라서 방위자는 지혜를 사랑하고, 기백이 있으며, 민첩하고 강해야 한다고 결론짓습니다. 대화의 마지막 부분에서는 이러한 성격을 어떻게 키우고 가르칠 것인지에 대한 고찰이 중요하다고 강조하며, 이를 통해 정의와 부정이 어떻게 형성되는지를 탐구하는 것이 필요하다고 언급합니다.
교육은 신체를 위한 체육보다 영혼을 위한 음악에서 시작해야 하며, 특히 어린이들에게는 올바른 이야기를 들려주는 것이 중요하다고 강조합니다. 여기서 '이야기'는 참된 것과 거짓된 것이 포함되며, 교육에서는 거짓된 이야기로 시작해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대화의 주인공은 고대 시인들이 쓴 이야기들, 특히 헤시오도스와 호메로스의 작품에서 발견되는 잘못된 묘사에 대해 비판합니다. 이들은 신들의 성격을 부정확하게 표현하며, 이는 젊은이들에게 부정적인 영향을 미칠 수 있다고 경고합니다. 따라서 이러한 이야기는 아이들에게 들려주어서는 안 되며, 오히려 올바른 가치관을 심어줄 수 있는 이야기들을 선택해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결국, 교육에 있어서는 무엇을 가르치고 어떤 이야기를 선택할지가 매우 중요하며, 잘못된 이야기는 아이들에게 부정적인 영향을 미칠 수 있으므로 신중하게 다뤄져야 한다는 점이 강조됩니다.
시인들이 신에 대해 이야기할 때, 신이 실제로 존재하는 것처럼 묘사해야 하며, 신은 본질적으로 선하다고 주장합니다. 선한 것은 해로운 것이 없고, 해를 입히지 않기 때문에 악의 원인이 될 수 없다고 설명합니다. 또한, 신은 좋은 것의 원인이지만 나쁜 것의 원인은 다른 것에서 찾아야 한다고 강조합니다. 호메로스와 같은 시인들이 신에 대해 잘못된 묘사를 하고 있다고 비판하며, 신이 인간에게 좋은 것과 나쁜 것을 무작위로 주는 식의 이야기를 받아들여서는 안 된다고 말합니다. 이 논의는 신의 본성과 시인의 역할에 대한 깊은 성찰을 담고 있습니다.
신이 인간에게 죄의 원인을 주지 않으며, 신의 행위는 항상 의롭고 선하다. 또한, 신이 인간의 고통이나 비참함의 원인으로 지목되어서는 안 된다고 강조합니다.
시인들이 신의 행위를 부정적으로 묘사하는 것을 허용해서는 안 되며, 신은 모든 것의 원인이 아니라 선한 것의 원인으로만 언급되어야 한다고 말합니다. 이어서 신의 본질에 대한 질문이 제기되며, 신은 변하지 않으며 가장 적은 변화만을 겪는 존재로 설명됩니다. 이는 신이 가장 완전하고 훌륭한 존재이기 때문이라는 논리로 이어집니다.
한 인물은 신이 변할 수 있는지를 묻고, 상대방은 신이 변한다면 더 나쁜 상태로 변할 수밖에 없다고 주장합니다. 따라서 신은 변하지 않으며 항상 최상의 상태를 유지해야 한다고 결론짓습니다.
또한, 시인들이 신을 다양한 모습으로 묘사하는 것에 대해 비판하며, 이러한 표현이 신들에 대한 불경스러운 인식을 초래할 수 있다고 경고합니다. 대화는 거짓말의 본질과 인간의 영혼이 진리에 대한 욕구를 가지고 있다는 점으로 이어지며, 진정한 거짓말은 영혼에서의 무지와 관련이 있음을 강조합니다. 결국, 진리와 허위에 대한 깊은 성찰이 이루어지는 장면입니다.
신들이 거짓말을 하지 않으며, 그들은 단순하고 참된 존재라는 점에 동의한다. 신들이 인간의 무식이나 광기 때문에 거짓을 말할 필요가 없다. 또한, 호메로스와 아이스킬로스 같은 고대 시인들이 신들에 대해 잘못된 묘사를 했다는 점을 지적하며, 그러한 내용이 젊은이들에게 가르쳐져서는 안 된다고 강조합니다. 결국, 신들은 변하지 않고 진실하며, 인간도 신을 닮아야 한다는 결론에 이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