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의 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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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은 중국의 역사에 관한 내용이다. 중국은 옛날부터 역사가 많기로 유명한 대제국으로 알려져 있다. 지금도 중국은 오랜 세월 동안 여러 번의 혼란을 겪어 왔음에도 불구하고, 전통적으로 유구한 문화들이 남아있다. 게다가 중국인들은 자신의 역사에 대해 자부심을 느낀다. 아울러 외국인들도 동양 역사에서 첫 번째는 중국 역사라고 말할 정도로 중국은 역사가 깊다.

고고학적 자료[+/-]

기원 논쟁[+/-]

고대[+/-]

하•상•주 국(夏•商•周 帝國)[+/-]

이 시대는 지극히 오래된 시대였기 때문에 정확한 유물이나 유적 등이 발굴되지 못한 경우가 대부분이다. 물론 어느 정도는 유물이나 유적 등이 발굴되어서 사실인 경우도 있지만, 대체로 이 시대는 허구적인 내용도 적지 않다.

구석기 시대에는 유명한 유적지로는 170만년 전 윈난 성(雲南 省)에서 원모인이 발견되었다. 또 500000년 전에 베이징 특별시(北京 特別市) 부근의 저우커우뎬(周口店)에서 베이징인이 발견되었다. 이는 서양인과는 다른 골격 구조에 몽골 계통의 골격 구조이며, 중국의 구석기 시대가 존재했음을 의미하기도 한다. (참고로 이것은 서방전래설의 부정 근거이다.)

신석기 시대에는 유명한 유적지로는 기원전 7000년 경에 마제 석기와 토기와 농경 생활과 목축 등을 시행했던 것으로 씨족 공동체 사회를 이뤘다는 증거가 있다. 허난 특별성(河南 特別省) 안양 시(安陽 市) 부근의 상대 유적지에서 상 제국(商 帝國) 문화와 룽산(龍山) 문화와 양사오(仰韶) 문화가 상중하의 문화층을 이루고 있는 형태로 발견되어 각 문화의 관계와 시대적인 선후를 입증한다. 결과적으로 신석기인이 현대 중국인의 확실한 조상이라는 사실이 확인되었다.

현재로써는 상 제국이 중국 역사상 최초의 황조로 거듭난다. 그 이전의 황조인 하 제국의 경우는 불행히도 뚜렷한 유적이나 유물이 남아 있지 않기 때문에 전설상의 황조라고 불린다. 전설상의 역사에서 나오는 8명의 대천황을 삼황오제(三皇五帝)라고 하는데, 삼황은 으뜸 신간으로써 고기잡이를 가르쳐 준 복희(伏羲)와 농사와 의학과 약초의 신간인 신농(神農)과 불을 사용하는 법을 가르쳐 준 수인(燧人)이고, 오제는 중국의 시조로 섬겨지는 황제(黃帝)와 전욱(顓頊)과 제곡(帝嚳)과 요(堯)와 순(舜)이다. 중국 신화에는 이들에 대한 일생이 잘 기록되어 있다.

아무튼 상 제국의 비밀을 풀어준 것은 바로 그 유명한 갑골 문자이다. 그리고 이 갑골 문자는 상 제국의 유적지인 은허(殷墟)를 발견하게 한 결정적인 단서로 자리 잡았다.

춘추 전국 시대(春秋 戰國 時代)[+/-]

진 제국(秦 帝國)[+/-]

드디어 중국에서 첫 번째로 제국을 세워서 황제의 자리에 오른 영정(嬴政)은 춘추 전국 시대를 종결시킨다. 그리고 수도를 함양 특별시(咸陽 特別市)로 정하여 대도시로 발전시키는 한편, 자신이 왕보다 더 높은 존재가 되기 위해 세계에서 가장 직위가 높은 황제의 자리에 올랐다. 참고로 황제이라는 직위는 대신들이 영정에게 바친 매우 높은 직위였다. 도교 사상에서 자세히 나오지만, 태황(泰皇)과 황제(皇帝)과 지황(地皇)을 바탕으로 한 직위 중 가장 높은 직위를 대신들이 조사하여 영정에게 바친 것이었다. 처음에 대신들은 영정에게 대태황이 가장 높은 직위인 것을 알고 영정에게 이 칭호를 바치려고 했으나, 정작 영정은 황제이라는 칭호가 맘에 들어 결국 이 황제이라는 칭호를 쓰기 시작했다.

아무튼 영정은 우선 권력을 확고히 다지기 위해서, 종전에 시행했던 봉건 제도를 완전히 없애 버리고 군현 제도를 채택한다. 이 군현 제도는 지방에 있는 대영주들의 권력을 최대한 떨어뜨리는 데 한 몫을 했고, 자신의 권력을 더욱 강화하는 데 큰 도움을 준다. 이 군현 제도는 황권 강화에 큰 몫을 하였고, 덕분에 지방 세력들이 들고 일어나는 것을 어느 정도 방지할 수 있었다. 사실 영정이 이러한 제도를 시행할 수 있게 도와준 사람은 바로 황제을 따르는 대승상인 이사(李斯)였고, 이사는 엄격한 법과 형벌로 제국을 다스려야 한다는 법가 사상에 심취해 있었다.

이사는 영정에게 지방에 있는 대영주들의 권력을 없애버리기 위해서, 영정에게 한 계책을 상주했고 영정은 이사의 말대로 따라 지방에 있는 대영주들을 수도로 불렀다. 그렇지만 지방에 있는 대영주들도 호락호락 하지는 않았다. 그래서 영정은 이사의 계책에 따라서 그들에게 편지로써 이런 말을 전했다. 지방의 모든 대영주들은 자신의 대신으로 충성을 맹세하라고 하는 한편, 대영주들의 권리는 인정하여 그들이 다스리는 지방에는 간섭하지 않고 다스릴 수 있게 자치권을 인정해 준다는 내용을 적어 보냈다. 결국 지방의 모든 대영주들은 영정의 속임수에 넘어가 모두 수도로 모이게 된다. 지방의 모든 대영주들이 모두 수도로 모이자, 지방의 권력자는 텅텅 자리가 비게 되었고, 물론 이 자리는 영정을 섬기는 대신들이 감쪽같이 대영주의 자리를 차지해 버리고 말았다. 결국 수도로 올라온 지방의 모든 대영주들은 고향으로 내려가지도 못하고 계속 수도에만 있어야 했으며, 지방의 모든 대영주들은 영정에 의해서 반역을 계획했다는 이유로 관직에서 쫓겨나거나 죽임을 당하기까지 하였다. 그리고 새로운 지방의 권력자들은 영정을 섬기는 대신들이 되어 버렸고, 이들은 황제에게 절대적으로 충성을 맹세한 지라 아무도 영정에게 대들지 못하는 상황이 되어버렸다. 이 덕분에 영정은 절대적인 지배자로 군림하게 된 것이다.

그리고 영정은 국방력 강화를 위해서 지원제인 모병제 대신에, 징집제인 부병제를 직접 채택했고, 이렇게 강력해진 군대를 이용해서 북쪽으로는 북적 제국(北狄 帝國) 중 강력한 힘을 가진 흉노 제국(匈奴 帝國)과 오환 제국(烏桓 帝國) 등을 토벌하여 국경을 튼튼히 하고, 남쪽으로는 남만 제국(南蠻 帝國)에 해당하는 지금의 광둥 광역성(廣東 廣域省) 부근까지 영토를 넓혀 방대한 영토를 확보했다. 그리고 황제의 권위를 세계만방에 알리고자 자신이 거주하려는 황궁인 아방궁(阿房宮) 등을 포함해서 화려한 건축물들을 건설하기 시작한다. 그 유명한 만리장성(萬里長城)은 진 제국 때 지어지기 시작했다. (물론 만리장성은 진 제국 이전 시기에도 지어져 있었다. 다만 영정은 따로따로 흩어진 만리장성들을 거대한 장성으로 만들고자 보수 및 확장공사를 감행했을 뿐이다.) 만리장성은 자그마치 2700km의 길이에 이르러 인간 족이 이룩한 최대의 공사로 손꼽히고 있으며, 아울러 세계문화유산으로 등록될 정도로 유명해졌다.

그러는 한편 영정은 정치적으로 자신의 권위를 드높여갔고, 경제적으로 진 제국을 발전시키고자 지방과 지방간의 무역을 끊임없이 시행해 나갔다. 황허 강(黃河 江)에서부터 창 강(長 江)까지의 사이에 있는 지역에 많은 대운하를 만들어 지역 교류를 원활하게 했고, 그 결과 황허 강 북부와 창 강 남부의 특산물들이 서로 교환되어가면서 중국의 문물들이 다양하게 발전해나가기 시작했다. 또한 영정은 문화와 문자와 생활 등 실제로 중국을 ‘한 개의 제국’으로 통일한 인물로 받들어진다. 영정의 가장 중요한 업적이 문자의 통일이었고, 이는 기원전 1200년 경부터 널리 쓰이기 시작한 한자는 각 지방마다 다르게 변천하여 쓰고 읽는 방법이 달랐기 때문이었다. 영정은 읽는 법과 뜻을 모두 한 개로 통일하여 비로소 중국에 통일 문화의 기틀을 마련했다. 또한 각 지방마다 다르게 쓰이는 계량과 측량의 단위도 통일했고, 글씨를 대나무에 써 오던 것을 처음으로 붓과 먹으로 비단 위에 쓰게 필기법을 개발하였다. 그리고 마차의 두 바퀴 축의 길이가 중국 전 지역에서 같게 통일하기까지 했다.

그러나 영정은 지나친 독재 정치로 분서갱유(焚書坑儒)라는 악행을 저질렀는데, 분서갱유란 바로 서적들을 불사르고 선비들을 땅 속에 묻는다는 말이다. 즉 법가 사상이나 농업이나 상업이나 의학 등 실용적인 책을 제외한 나머지 유가 사상이나 맹가 사상 등 법가 사상에 반대하는 책들은 황제의 명령에 의해서 불태워지고 말았고, 황제의 공포 정치에 크게 반발한 유생들은 모조리 잡아들여 땅 속에 묻어버렸는데 그 수가 460여명에 달했다고 한다. 영정의 무자비한 독재 정치로 인해서 급기야는 백성들의 반란이 끊이지 않게 되었다.

이렇게 영정이 죽고 난 후 황제의 자리는 영정의 열여덟 번째 아들인 영호해(嬴胡亥)가 차지했다. 그러나 영호해는 환관인 조고(趙高) 때문에 골머리를 앓고 있었는데, 조고는 권력욕이 매우 심한 사람이었기 때문이었다. 게다가 당시 진 제국은 백성들의 불만이 쌓여 각 지방에서 황제에 대해서 반란을 일으키려는 움직임이 있었고, 특히 진승(陳勝)과 오광(吳廣)을 중심으로 한 큰 반란이 끊이지 않고 있었다. 이 틈을 타서 진 제국에 대항해서 벌떼처럼 들고 일어난 장수들 가운데 가장 큰 세력을 떨친 자들이 등장하기 시작하는데.

전한 제국(大漢 帝國)[+/-]

전한 제국의 1대 황제가 되는 유방(劉邦)은 본래 한 국가를 다스리고 있는 평범한 대영주였다. 하지만 진 제국이 멸망하여 각 지방에서는 반란이 일어나 세상이 매우 혼란스러웠고, 결국 유방은 자신의 군대를 이용하여 세상을 통일하여 제국을 세우려고 하였다. 유방은 자신의 최대 천적이자 초 제국(楚 帝國)을 건설하려던 항우(項羽)를 무찌르는 데 성공하였고, 드디어 세상을 통일하는 데 성공한다. 참고로 유방은 중국 역사상 첫 번째로 평민 출신으로 황제의 자리에 오른 사람이기도 하다. 그래서 유방은 제국을 세우고 나서 평민들의 마음을 잘 알 수 있었고, 그렇게 백성들을 안심시키는 정책을 많이 실행했다. 그러는 한편 수도를 장안 특별시(長安 特別市)로 옮기면서 자신의 세력을 키워나간다. 그리고 유방은 정치적인 면에서 매우 뛰어난 일을 많이 했다.

그 증거로 주 제국은 봉건 제도를 택하였으나 지방 제후를 손아귀에 넣지 못해서 망했고, 진 제국은 강력한 군현 제도를 시행했으나 강대한 황제인 영정이 죽고 나서 망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유방은 주 제국의 봉건 제도와 대진 제국의 군현 제도를 적절히 혼합하기로 결정했고, 이는 곧 군국제로 불려졌다. 중앙 지방에는 황족과 황제을 중심으로 하고, 변두리 지방에 있는 제후국을 두어 왕족과 공신들을 왕으로 앉히고, 가까운 곳에는 관리를 두어 중앙 집권제도를 완벽히 갖추었다.

이후 유방이 죽고 나서 여러 번 황제의 자리가 바뀌어져 혼란이 찾아왔다. 하지만 유방이 평소에 다져놓은 기초는 매우 튼튼했기에 제국은 쉽게 멸망하지 않았으며, 7대 황제인 세종(유철-劉徹) 시기에는 더욱 성장한 제국으로 거듭나기 시작한다. 유철은 자신의 권위를 노리는 자들이 함부로 반항하지 못하게 길들이기로 결정했다. 하늘과 땅이 두 쪽으로 갈라진대도 황제의 자리는 절대로 넘볼 수 없는 것을 말했고 또한 황제을 위해서 목숨까지 바칠 충성심을 길러야 한다고 말했다. 이를 위해서는 충성과 효도를 가장 귀하게 여기며 폭력을 배척하라는 유가 사상가인 공구의 가르침보다 나은 것이 없을 것이라고 판단했다.

드디어 유교가 황제에 의해서 다시 국교로 삼아지며 유가 사상을 널리 가르칠 학교가 필요가 생겼다. 박사들과 석사들 같은 똑똑한 사람들을 두어 유가 사상을 연구하게 하고 공구의 가르침을 모든 왕들과 백성들의 머리에 뿌리박히게 하려고 노력했다. 그 결과 유교는 크게 번성하기 시작했다.

그런데 황실의 외척인 왕망(王莽)이라는 자가 등장한다. 왕망은 평소에 성격이 매우 깐깐했고, 높은 사람이건 낮은 사람이건 상관없이 마치 황제처럼 행세해서 자신의 뜻에 반대를 하는 자들은 모조리 처형시켰거나 시골로 내쫓아버렸다. 게다가 당시 대한 제국은 상황이 매우 좋지 않았는데, 과거 황제인 유철이 엄청난 전쟁과 원정으로 제국의 기둥을 엄청 흔들어 놓았다. 날로 세금이 늘어나 백성들은 곤경에 빠졌고, 외척과 환관들의 횡포로 대제국이 결국 혼란의 소용돌이에 휩쓸려버렸을 정도였다.

이때를 틈타서 왕망은 당시 14대 황제인 유간(劉衎)과 친분을 쌓아가면서, 자신의 딸인 왕씨를 유간에게 보내어 결혼하게 했다. 이렇게 왕망은 서서히 제국의 권력을 한 손아귀에 쥐기 시작했다. 평소 왕망은 매사에 엄격하고 절도 있는 모습으로 존경을 받았으나, 자신을 해치려 했던 황제의 어머니까지도 역적으로 몰아 사형시킨 무자비한 인물이었다. 이 사실을 알게 된 황제은 왕망을 암살시키려고 계획을 세웠다. 그러나 불행히도 왕망에게 그 소식이 전해져, 결국 왕망은 인정사정없이 황제을 독살해버리고 말았다!

신 제국(大新 帝國)[+/-]

드디어 반란을 성공적으로 일으킨 왕망이 황제의 자리에 올랐다. 장안 특별시에 수도를 그대로 두었고, 왕망은 이렇게 어지러운 제국을 바로잡기 위한 대대적인 개혁을 시행하였다. 이렇게 제국이 어지러운 상황에 처해진 이유는 무엇보다도 지방의 대영주들이 중앙 정부가 상당히 어수선한 틈을 타서 제멋대로 영토를 늘리고 권세를 누리고 있기 때문이라는 것을 알아내었다. 그리하여 왕망은 지방의 대영주들의 영토를 강제로 빼앗아 가난한 백성들에게 나누어 주고, 지방의 대영주들의 세력을 약화시켜 강력한 중앙 집권 대제국을 건설하려고 하였다. 이렇게 왕망은 전 국토를 완전히 국유화하는 데 성공하였고, 영토를 백성들에게 나누어주어 인덕을 쌓아가는 데 성공한다.

그리고 왕망은 지방의 대영주들이 감히 황제에게 반역을 하지 못하도록, 유가 사상을 국가 이념으로 삼아 탄탄한 정신적인 기틀을 마련하였다. 또한 노예 상호간의 매매를 절대적으로 금지시켜 인권을 중요시하게 여겼다. 하지만 이상하게도 이러한 개혁은 지방의 대영주들과 백성들에게 큰 만족을 주지 못했는데.

이렇게 왕망이 엄청난 노력을 통하여 과격한 개혁을 이루고자 했던 계획이 완전히 물거품으로 돌아가 버렸다. 그리고 왕망 자신도 평소 자신에 불만을 품고 있었던 귀족들에게 암살당했으며, 신 제국은 건국한 지 불과 15년 만인 23년에 망하고 말았다. 주인이 없어진 중국은 한동안 대권을 노리는 귀족들의 전쟁터로 변모해버리고 말았고, 다시 분열된 제국들이 나타날 조짐이 보이기까지 했다. 그러나 이러한 전쟁을 종결시키고 다시 통일 제국을 만들고자 하는 무리가 등장하기 시작하는데.

후한 제국(大漢 帝國)[+/-]

25년에 이러한 분열 상황을 없애고 전한 제국의 혈통인 유수(劉秀)가 제국을 건립하고 황제의 자리에 올랐다. 유수는 저주받은 장안 특별시를 버리고 과감히 수도를 뤄양 특별시(洛陽 特別市)로 옮기며 경제 발전을 위해서 갖은 노력을 했다. 유수는 일단 강력한 중앙 집권제를 이룩하여 대제국의 기반을 다지고 영토를 넓혀 나가기 시작한다. 물론 국방력도 크게 강화되어 당시 서양 세계에서 최고의 국력을 자랑하는 대 로마 제국과 맞먹을 정도로 영토가 매우 거대해졌다. 그리고 대 로마 제국과의 무역을 통해서 경제가 매우 발전하여 문화에까지 영향을 미친다. 유수는 문화 발전에도 큰 몫을 해냈으며, 모든 중국인들이 본격적으로 이제 같은 말을 쓰기 시작했고, 문자까지 통일하여 한자라는 같은 문자를 사용하기 시작했다. 일명 한문화(漢文化)를 발달시켜 오늘날의 중국 문화를 이룩하는 데 큰 힘을 주었다.

그리고 이때 희대의 발명품인 종이가 등장하게 되었는데, 바로 황실 고위 관리인 채륜(蔡倫)이 나무와 갖은 재료들을 활용해서 만든 것이 종이인 것이다. 종이는 세계로 널리 퍼져나가 중국의 발명품에 속하게 되었다. 종이의 발명은 문화 발전에 큰 몫을 했는데, 기록을 위한 재료가 비로소 해결된 까닭이었다. 물론 서양 세계로까지 널리 퍼져 인간 족 문화의 발전에 크게 이바지한 것은 당연하다.

삼국 시대(三國 時代)[+/-]

한편 황궁은 황제을 보좌하는 열 명의 내시들이 제국을 말아먹고 있었다. 이들은 십상시(十常侍)로 불리었고 그 당시 황제인 유굉(劉宏)을 보좌하면서 자신들이 권력을 멋대로 행사해나가기 시작했다. 이런 십상시에 대항해서 노란 두건을 쓴 도적들이 반란을 일으키고 마는데, 이것이 바로 황건적의 난이라고 불리는 반란이다. 황건적의 대장인 장각(張角)은 아우인 장보(張寶)와 장량(張梁)과 힘을 합쳐 후한 제국을 멸망시키고 자신들만의 황국을 건설하기 위해서 백성들을 선동했고, 선동된 백성들은 후한 제국을 멸망시키고 황건적이 황국을 세울 수 있게 도와주기까지 하였다. 하지만 황건적은 후한 제국을 보호하려는 군주들에 의해서 결국 무장 진압되고 말았고 장각과 장보와 장량도 전사하고 말자, 황건적의 잔당들은 뿔뿔이 흩어져버리고 만다.

그런데 문제는 황건적들을 멸망시킨 세력들이 황제의 자리를 넘보고 있었다. 다른 군주들이 황제의 자리를 넘보고 있을 정도라면, 그만큼 후한 제국은 힘을 잃어가고 있었다는 증거다. 게다가 기존의 황제인 유굉이 사망하고 그의 첫 번째 아들인 유변(劉辯)이 어린 나이에 황제의 자리에 오른다. 결국 황실 내시들이었던 십상시들이 어린 황제을 깔보며 자신들의 권위를 강력히 하기 위해서 제대로 난리를 치기 시작한다. 그 당시 황제의 대신이요 태후의 오빠이자 대사마였던 하진(何進)을 십상시들이 몰래 암살해버리는 사건이 일어난다. 물론 십상시들의 악행에 참다못해 제국을 보호하려는 군주들에 의해서 십상시들은 모조리 처형당했으며, 황제과 황족들은 이 난리 속에서 벗어나기 위해서 황궁을 벗어나 다른 곳으로 피신했다. 그런데 공교롭게도 황제 일족들 앞에 나타난 어떤 군주가 다가오더니 황제을 지키겠다는 명분으로 황제와 황족들을 납치해버렸고 어디론가 사라져버렸다. 그 군주는 동탁(董卓)이라는 자였으며, 본래 이민족 출신의 장군이었으나 후한 제국이 힘을 잃어갈 무렵 권력욕이 제대로 발동해서 결국 때를 보다가 황제과 황족들을 납치하고는 다시 수도인 뤄양 특별시로 이끌고 가 버린다.

동탁은 본래 권력욕이 상당히 심했던 사람이었는데, 그 증거로 자신이 승상의 자리에 오르자 멋대로 황제을 갈아 치워버리는 악행을 저질렀다. 대신들이 모조리 반대했지만, 동탁에게는 당시 가장 뛰어난 무술을 가지고 있는 여포(呂布)라는 부하가 있었기 때문에 겁도 없이 대신들의 의견도 무시하고 기존의 황제인 유변을 황제의 자리에서 내쫓았으며, 유굉의 두 번째 아들이자 유변의 남동생인 유협(劉協)을 황제의 자리에 앉혀버렸다. 이렇듯 동탁은 황제을 갈아치워 버린 이후, 자신에 대해서 반대하는 대신들은 모조리 쫓아내거나 죽여 버렸다. 심지어는 죄 없는 백성들의 재산을 몰수하거나, 자신의 마음에 들지 않는다면 그들을 모조리 죽여 버리기까지 했다!

끝내 동탁의 악행에 참다못한 지방의 군주들이 동탁에 대해서 반란을 일으키고 말았다. 물론 명목상으로는 황제을 구원하고 자신이 새로운 실력자가 되기 위해서였지만, 어쨌든 동탁의 악행은 다른 지방의 군주들이 참을 수 없을 정도로 심각했기 때문이었다. 이렇게 반 동탁 연합군을 결성한 자는 조조(曹操)라는 군주였는데, 본래 조조 역시 황제을 모시는 대신이었지만 동탁의 악행을 참지 못하고 결국 고향으로 돌아가서 반 동탁 연합군을 결성한 것이다. 반 동탁 연합군은 지방의 군주들이 일치단결하여 만든 세력이었고, 세력은 나름 컸지만 사실상 어중이떠중이들이 모인 허접한 세력들이었다. 게다가 반 동탁 연합군의 대장은 성격이 우유부단한 원소(袁紹)라는 자가 되었고, 그런 원소는 대장 노릇을 제대로 하지도 못했다.

이렇듯 반 동탁 연합군은 당시 창 강 지역에서 강력한 세력을 유지하고 있는 군주인 손견(孫堅)이라는 자를 선두로 보내어 동탁이 있는 뤄양 특별시로 출격했다. 손견은 동탁의 부하 장수들을 전사시키며 뛰어난 능력으로 거의 승기를 잡아가기 시작했다. 하지만 손견을 질투하는 반 동탁 연합군들의 군주들의 계략에 의해, 손견에게 군량을 지급해 주지 않았고 끝내 손견의 군대는 군량이 없어서 패배하고 말았다. 그리고 손견은 전쟁이 끝나자마자 반 동탁 연합군의 본부를 습격하여 연합군에 소속된 군주들을 모조리 죽여 버리고 싶어 했으나, 부하 장수들의 만류로 참고 결국 다시 고향으로 돌아가 버리고 말았다. 결국 반 동탁 연합군은 서로 믿지 못하여, 내부에서 싸움이 벌어지기까지 했다.

비록 반 동탁 연합군이 이렇다 할 성과도 내지 못하고 결국 해산되기 일부 직전까지 왔으나, 동탁은 그래도 손견을 포함한 다른 지방의 군주들을 두려워했다. 결국 동탁은 이 일을 해결하고자 자신이 황제인 양 권력을 또다시 이용하였는데, 바로 제국의 수도를 옮기려는 계획을 갖고 있었다. 당시 제국의 수도는 뤄양 특별시였고, 유수가 저주받은 장안 특별시를 버리고 수도를 새롭게 정했다. 그런 만큼 뤄양 특별시는 상당히 발전된 국제 도시였고, 대신들도 이에 대한 불만 없이 뤄양 특별시에서 평화롭게 잘 살기를 원했다. 하지만 동탁은 자신의 세력과 가까운 장안 특별시에 수도를 정하고 황제을 멋대로 이용해먹기 위해서 결국 대신들의 거센 반발에도 굴하지 않고, 뤄양 특별시에 있는 황족들과 귀족들과 백성들을 모두 장안 특별시로 모두 강제 이민을 시켰다. 게다가 동탁은 여포로 하여금 황실 유물을 모조리 도굴하여, 자신의 재물을 늘리는 데에 신경을 썼다.

황폐한 장안 특별시로 강제 이민을 온 황족들과 귀족들과 백성들은 모두 동탁에 대해서 큰 불만을 가지고 있었다. 하지만 앞서 말했듯이 동탁은 현재 중국에서 세력이 가장 강력하고 또한 자신의 부하이자 양아들인 여포를 심복으로 삼고 있었기 때문에, 좀처럼 동탁에 대해서 반란을 일으키기가 어려웠다. 하지만 백성들의 소리는 곧 하느님의 소리라고 말했던가, 동탁에게도 곧 위기가 닥쳐오기 시작했다. 바로 제국의 대신이자 황실에 대해서 절대적인 충성을 다하는 자인 왕윤(王允)이 동탁을 암살하기 위해서 계획을 꾸미고 있었다.

왕윤은 후한 제국에 충성을 다하는 대신이었고, 그런 만큼 애국심이 상당히 강했다. 따라서 동탁 따위가 황제 폐하를 무시하고 자신이 황제인 양 행세하는 것을 결코 보고만 있지는 않았다. 왕윤은 제국을 바로잡고 다시 원래 자신이 모셔왔던 황제을 위해서, 위험을 무릅쓰고 동탁 암살 계획을 꾸미고 있었던 것이다. 때마침 동탁의 양아들인 여포가 동탁의 눈에 거슬릴 정도로 개념 없는 언행을 자주 일삼자, 결국 동탁은 여포를 무시하고 심지어는 죽이려고까지 하였다. 이에 여포는 동탁에 대해서 큰 불만을 갖게 되었고, 왕윤은 이 기회를 놓치지 않고 여포를 자신의 편으로 끌어들이는 데 성공한다.

그리고 왕윤은 때가 다가오자, 황궁으로 찾아가 황제을 알현하였다. 왕윤은 황제에게 자신이 그 동안 계획했던 계책을 보고하였고, 황제를 위해서 동탁에게 가짜로 황제의 자리를 물려준다는 조서를 받아내었고, 불안에 휩싸인 황제을 안심시켜 꼭 황제 폐하가 다시 권세를 누릴 수 있게 도와준다고 약속하였다. 그 계책이란 바로 동탁에게 황제의 자리를 물려준다는 거짓 조서를 작성하여 동탁의 마음을 들뜨게 한 뒤, 동탁이 황궁에 발을 내딛는 순간 즉시 암살해버리겠다는 내용이었다. 황제 역시 매우 만족해하며 왕윤에게 그 계책을 시행할 것을 허락했다. 한편 동탁은 왕윤의 계책에 빠져 결국 자기를 따르는 모든 대신들을 이끌고 즐거운 마음으로 황궁 앞에 도착하였다. 하지만 동탁을 기다리는 것은 싸늘한 죽음뿐이었으니, 바로 그의 양아들 여포가 동탁을 향해서 칼을 휘둘러 동탁의 목을 베어버렸다!

결국 대신 왕윤과 여포의 활약으로 대역적 동탁은 사망하고 말았다. 동탁의 시체는 장안 특별시에 있는 큰 광장에 방치되었는데, 장안 특별시의 모든 시민들과 동탁에 의해서 강제로 장안 특별시로 이주를 당한 뤄양 특별시의 모든 시민들은 같이 동탁의 시체를 마구 때리고 오물을 쏟아 붇기까지 했다. 그것마저 모자라 동탁의 옷을 벗겨 그의 배꼽 위에 커다란 촛대를 세워 촛대에 불을 붙였는데, 동탁의 뱃속에 있던 기름들이 부글부글 끓어올라 동탁의 시체는 흉한 모습이 되어버렸다. 최종적으로 동탁의 시체는 결국 모든 시민들에 의해서 불태워졌다. 아무튼 이렇게 대역적 동탁을 처단하는 일은 무사히 끝났지만, 동탁의 부하들이었던 이각(李傕)과 곽사(郭汜) 일행이 몰래 반란을 일으킬 준비를 하고 있었다.

위 제국(魏 帝國)[+/-]

위 제국(魏 帝國)을 건국한 조조의 세 번째 아들인 조비(曹丕)는, 뤄양 특별시에 수도를 정함으로써 황제의 자리에 올랐다. 과거 조조는 스스로 황제이 되는 것을 사양하고 끝까지 후한 제국의 대신이자 위 제국의 왕으로 남아서 유협 황제을 잘 보살피다가 사망했으나, 세 번째 아들인 조비는 아버지와는 다르게 권력욕이 매우 심했고, 결국 후한 제국의 마지막 황제인 유협을 황좌에서 몰아내고 자신이 황좌에 앉음으로써 새로운 제국의 황제이 된다. 그리고 자신의 아버지인 조조에게는 태조 무황제로 추증하였다. 조비는 대제국을 세우면서 자신들에게 반발했던 세력들을 숙청해나가기 시작한다. 심지어 조비는 자신들의 형제들조차 세력이 커질 것을 우려하여 그들의 권한을 최대한으로 빼앗아버리거나 몰래 암살시켜버리는 등 악행을 저지르면서까지 제국을 위해서 발전을 시켜나간다. 특히 조조의 네 번째 아들인 조창(曹彰)에게는 자신의 황궁으로 강제로 끌고 와서 그의 군대를 모조리 몰수하여 자신의 군대로 편입시키며 그를 시골로 내쫓았으며, 조조의 다섯 번째 아들인 조식(曺植)에게는 자신의 황궁으로 강제로 끌고 와서 시를 여러 편 짓게 했으며 그가 자신이 내세운 조건에 맞게 시를 잘 지어내자 그의 벼슬을 모조리 빼앗고 시골로 내쫓았으며, 조조의 여섯 번째 아들인 조웅(曹熊)에게는 겁을 주어 그가 결국 자살하도록 만들었다. 그리고 과거에 자신의 아버지 조조에게 끔찍이 충성을 다 했던 신하들이라도 자신에게 반대하는 자들은 자신에게 충성을 다 하지 않는다는 이유를 들어 그들을 처형시키거나 혹은 시골로 내쫓아버렸다.

그래도 조비는 아버지인 조조의 뜻을 받들어 민생 안정에 엄청난 노력을 기울인다. 비록 자신들의 반대 세력들을 무자비하게 처리하는 모습도 보였지만, 그래도 현명한 황제답게 백성들의 삶에도 직접적으로 관여하여 그들이 편하고 넉넉하게 살 수 있게 많이 도와주었다. 한편으로는 오 제국과 촉 제국을 멸망시키기 위해서 군사력 증강에도 엄청난 힘을 썼다. 그 증거로 조비는 촉 제국이 잠시 힘을 잃은 사이에, 곧바로 군대를 정비하여 오 제국을 공격할 준비를 한다. 사실 대신들은 조비가 오 제국과의 전쟁을 벌이는 것을 막으려고 했었고, 당시 무더운 혹서기 시절이라 군사들이 무더위에 쓰러져 전투력을 많이 상실할 수도 있다는 충고를 했다. 하지만 조비는 삼국 통일에만 너무 얽매인 나머지 대신들의 의견은 듣지도 않고 당시 대장군이었던 사마의(司馬懿)에게 대제국을 맡겨달라는 부탁을 하고, 자신은 곧바로 오 제국을 공격하기 위해서 군대를 출동시킨다. 그렇지만 군사력을 제외하고 지리적으로나 기후적으로나 모두 오 제국이 압도적으로 앞서 나갔다. 더군다나 오 제국들의 장수들이 목숨을 걸고 강력히 지켜내자, 조비는 아무런 성과도 못 내고 후회하면서 군대를 철수시키고 말았다. 그리고 전쟁의 휴우증 때문인지 조비는 결국 병에 걸려 죽고 말았다.

이후 조비의 첫 번째 아들인 조예(曹叡)가 황제의 자리를 물려받게 된다. 우선 조예는 아버지의 뜻을 이어받아 백성들을 위한 정책들을 시행했다. 그리고 조예는 자신의 아버지인 조비에게 세조 문황제로 추증하였다. 조예 역시 할아버지인 조조와 아버지인 조비처럼 똑똑하고 용감한 황제이었다. 조예는 우선 과거 조비 황제 시절에 억울하게 벼슬자리에서 쫓겨난 대신들을 다시 복귀시켜, 그들이 제국을 위해서 큰 힘을 발휘할 수 있게 아낌없이 도와주었다. 한편으로는 백성들의 삶을 잘 파악하여 백성들이 사는 데 어려움이 없게 노력을 해 왔다. 하지만 조예는 당시 나이가 어린 탓에 남의 고자질을 잘 믿는 흠집을 보여주기도 했다. 그 증거로 조조 대천왕 시절 때부터 위 제국을 섬긴 사마의를 자신에게 반역을 한다는 증거를 알아채고, 결국 그의 벼슬을 모조리 빼앗아 시골로 내쫓아버렸다.[1]

오 제국(吳 帝國)[+/-]

오 제국(吳 帝國)을 건국한 손견의 두 번째 아들인 손권(孫權)은, 진예 특별시(建業 特別市)에 수도를 정함으로써 황제의 자리에 올랐다. 본래 손권은 황제로써 만족해나가며 제국을 잘 발전시켜 나가고 있었으나, 대신들이 손권에게 한 단계 더 높은 황제의 직위에 오를 것을 상주했고, 결국 손권은 제국의 힘을 막강하게 키우기 위해서 황제의 자리에 오른다.자신은 황제으로써 권력을 계속 유지하기 위해서 손책에게 대천황 직위를 추증하지 않은 것.</ref> 한편으로는 손권은 대신들의 의견을 받아들여 대촉 제국과의 동맹 관계를 더욱 유지시키면서 위 제국을 멸망시킬 계획을 세우고 있었다. 그러나 손권은 대외적인 문제들보다 대내적인 문제들에 더욱 힘을 기울였으며, 특히 민생 안정에 엄청난 힘을 썼다. 경제 발전을 이룩하면서 백성들의 삶을 풍요롭게 하기 위해서 많은 노력을 했고, 그 결과 경제력은 계속 성장해나가기 시작한다. 위 제국의 침입에도 유능한 여러 대신들을 이용해서 무사히 막아내었고 더 이상 위 제국이 함부로 쳐들어오지 못하게 할 정도로 군사력도 키워나갔다. 또한 손권은 유능한 대신들을 활용하여 자신의 대제국에 대해 반란을 일으켰던 오 제국의 동남 지역인 산월 제국(山越 帝國)을 토벌하여 영토를 점점 넓혀나가기 시작한다.

그러나 손권은 나이가 든 말년에 노망이 나 버렸고, 자신이 믿고 아껴왔던 대신들조차 모조리 귀양 보내버리거나 사형에 처하는 등 온갖 악행들을 저질렀다. 결국 손권의 뒤를 이은 황제이 손권의 일곱 번째 아들인 손량(孫亮)이었는데, 지나치게 나이가 어리다는 것이 흠이었다. 본래 손권은 자신의 첫 번째 아들인 손등(孫登)에게 황제의 자리를 물려주려고 하였으나, 불행히 손등이 일찍 죽어버렸기 때문에 결국 손권은 남아있는 자식들 중에 황제의 자리를 줄 수밖에 없었다. 불행히도 두 번째 아들인 손려(孫慮)마저 일찍 죽어버렸기 때문에 결국 세 번째 아들이자 황태자인 손화(孫和)와 네 번째 아들인 손패(孫覇) 중에서 황제을 물려주어야 했다. 하지만 늙어 노망이 나 버린 손권은 황태자의 구별을 없애버렸고, 대오 제국의 조정은 손화파(孫和波)와 손패파(孫覇波)로 나뉘어졌다. 손권은 이 사태를 종결하고자 눈물을 머금고 손패를 죽여버리고, 손화를 황태자의 자리에서 내쫓아 버리고 강등시킨 뒤 황궁에서 내쫓아버렸다.

촉 제국(大蜀 帝國)[+/-]

촉 제국(大蜀 帝國)을 건국한 유비는, 청두 특별시(成都 特別市)에 수도를 정함으로써 황제의 자리에 올랐다. 사실 유비는 황제의 자리를 계속 거부해왔었는데, 바로 유비는 후한 제국의 충실한 신하였기 때문이었다. 후한 제국이 비록 위 제국에 의해서 망해버렸지만, 여전히 유비는 자신은 영원한 후한 제국의 신하라면서 지내왔다. 그러나 조비가 유협을 다른 지역으로 내쫓아내고 자신이 위 제국의 황제이 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충격을 받다가, 결국 대신들이 간곡히 상주하여 할 수 없이 유비는 후한 제국의 신하로써 한 제국을 계승하기 위해서 황제의 자리에 오른다. 그러는 한편 유비는 자신의 의형제인 관우를 처형한 오 제국의 황제인 손권을 없애기 위해서 오 제국을 공격하기 위해서 계획을 세운다. 하지만 대신들은 황제의 이러한 계획을 막으려고 했는데, 유비를 크게 도와 승상의 자리에 오른 제갈량마저 유비의 이 미친 계획을 막으려고 애를 썼을 정도였다.[2]

유선은 황제가 되기에는 좀 불안한 면이 있었는데, 바로 유선은 멍청하며 용기도 없는 겁쟁이였던 것이다. 때문에 실권은 사실상 승상인 제갈량에게 있었지만, 그래도 과거 유비 황제를 정성껏 섬긴 제갈량은 유비의 유언대로 유선을 잘 보살피며 정치를 시행한다. 우선 제갈량은 위 제국의 침입을 막아내며, 한편으로는 험악했던 오 제국과의 관계 개선에 큰 힘을 썼다. 그리하여 결국 촉 제국은 다시 오 제국과 동맹을 맺는데 성공하여 위 제국에 대항할 힘을 갖춘다. 그런데 때마침 촉 제국의 서남 지역인 남만 제국에서 큰 반란이 일어났고, 이 반란을 막기 위해서 드디어 제갈량이 자진하여 출전하기 시작한다.

당시 남만 제국의 황제은 맹획(孟獲)이라는 자였는데, 유선 이전의 황제인 유비에게도 반란을 일으켰던 자였다. 제갈량은 황제에게 남만을 빠른 시일 안에 정복하고 오겠노라고 맹세했고, 곧바로 남만 제국으로 출격하기 시작한다. 비록 남만 제국의 장수들이 용맹하다고는 하나, 제갈량의 뛰어난 계책에 의해서 속수무책으로 전락해버렸다. 그 와중에 제갈량은 남만 제국의 황제인 맹획을 전투 중에 생포하는 데 성공하였고, 그런 맹획을 따뜻하게 보살펴 대접해 준 다음 풀어주었다. 이후 제갈량은 계속 맹획을 잡았다 풀어주기를 7번이나 반복하였다. 마침내 맹획은 7번 만에 자신의 잘못을 크게 깨달았고, 7번째에 붙잡혔을 때 제갈량 앞에 무릎을 꿇고 자신의 잘못을 말하고 앞으로는 촉 제국에 대해서 절대로 반란을 일으키기 않겠노라고 맹세했다. 제갈량은 크게 감동하여 맹획을 위로하는 한편 잔치를 벌여 맹획의 기분을 좋게 하였고 다시 맹획을 조국으로 돌려보냈다.

그리고 제갈량은 남만 제국을 평정하고 드디어 위 제국을 공격하기 위한 전략을 제시하기 시작했다.

진 제국(晉 帝國)[+/-]

사마염(司馬炎)이 삼국 시대를 종결시킴으로써, 다시 통일 황조가 열렸다. 사마염은 수도를 뤄양 특별시로 정했고, 과거 삼국 시대와는 다르게 지방 자치제를 인정하지 않고 중앙 집권체제를 강력히 밀어붙였다. 이렇게 중앙 집권체제를 강력히 정비하여 황제의 힘을 강력하게 키워나갔고, 지방 군주들이 절대로 반란을 일으키지 못하게 첩자들을 보내 지방 군주들에 대한 상황을 파악하게 하였다.

하지만 이러한 사마염의 정책은 결국 도리어 자신의 아들들이 세력 다툼을 하는 데 일조해버렸고, 후에 진 제국은 팔황의 난(八皇之亂)이라고 불리는 반란들을 맞이하게 된다.

어쨌든 사마염은 자신의 후계자를 결정하려고 하였다. 그런데 여기서부터 문제가 생겨버렸는데, 상황이 사마염의 두 번째 아들인 사마충(司馬衷)이 황제의 자리에 앉을 수밖에 없었다. 본래 사마염은 첫 번째 아들인 사마궤(司馬軌)에게 황제의 자리를 물려주려고 했으나, 사마궤가 일찍 사망했기 때문에 할 수 없이 사마충을 대신 황제의 자리에 세운다. 사마충은 도대체 어떤 사람이라서 아버지인 사마염조차 황제의 자리를 못 주겠다는 식으로 나섰을까? 그것은 바로 사마충은 세상 물정을 전혀 알지 못한 바보였으며, 게다가 싸움도 다른 사람들과 겨루면 전부 패배할 정도로 엄청 약했기 때문이었다. 사마염은 사마충을 마지못해 황태자로 지목하면서 계속 걱정을 하다가 고통스럽게 죽고 말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마충은 황제의 자리에 오르는 데 성공한다. 하지만 예상대로 사마충이 황제의 자리에 오르자마자 전국 각지에서 끊임없이 반란이 일어났고, 백성들의 삶도 매우 좋지 못하다는 소식을 들었다. 그런데 사마충은 흉년이 들어 백성이 굶주린다는 말을 듣자 "쌀이 없으면 어째서 고기를 먹지 않는 것이냐?"라고 말할 정도로 굉장히 심각한 말을 남겼다. 그리고 어느 날 밤에 사마충이 황궁에서 공부를 하는데, 갑자기 황궁 밖에서 개구리들이 울자 이런 질문을 했다고 한다. "저 개구리들이 공적으로 울까? 사적으로 울까?"라고 묻자, 한심하게 여긴 어떤 대신은 "공유지의 개구리는 공적으로 울고, 사유지의 개구리는 사적으로 웁니다."라고 대답했다고 한다. 아무튼 사마충은 이럴 정도로 굉장히 행동과 말투 등에서 굉장히 장애가 있었다.

남•북조 시대(南•北朝 時代)[+/-]

중세[+/-]

수 제국(隋 帝國)[+/-]

수 제국의 1대 황제인 양견이 드디어 혼란했던 남•북조 시대를 종결시키고, 중국을 모조리 통일하는 데 성공한다. 양견은 우선 장안 특별시에 수도를 정했고, 백성들을 위한 정치를 하기 시작한다. 그 증거로 양견은 중국에서 첫 번째로 과거 제도를 시행한 장본인이 되었고, 관리를 채용함에 있어서 실력 위주로 선발하여 백성들로부터 큰 지지를 얻는다. 이 과거 제도는 청 제국 시대까지 계속 채택된 인재 등용 제도로 거듭났다. 양견이 왜 과거 제도를 시행하였는가 하면, 이제 오랜 전란으로 어지러워진 제국을 새로운 제도로 정비하여 훌륭한 인재를 골고루 등용하여 제국을 크게 발전시키기 위한 것이었다.

또한 양견은 제국의 안전을 위해서 북방 오랑캐의 침략을 막기 위한 정책을 펼친다. 만리장성을 대대적으로 수리하여 제국의 방벽을 든든히 하였으며, 아울러 군사력을 크게 강화시켰다. 또한 황제의 권위를 드높이기 위해서 황궁을 크게 새로 지었으며, 영토를 넓히기 위해서 대대적인 원정을 감행하기까지 했다. 하지만 양견이 이렇게 파격적인 정책을 내세웠음에도 불구하고, 백성들의 불만이 매우 컸으며 최후에는 결국 동이 제국 중 한 나라인 고구려와의 전투에서 크게 패배하여 황제의 권위를 잃었다. 게다라 양견을 노리는 어떤 세력들이 들고 일어나기 시작하는데.

놀랍게도 양견을 노리고 있는 사람은 양견의 두 번째 아들인 양광이라는 자였다! 양광은 평소 부황인 양견에 대해서 불만을 품고 있었으며, 때마침 양견이 고구려 원정에서 크게 패배하고 돌아온 뒤라 양광은 그런 자신의 아버지를 전혀 믿지 못했다. 황위를 강제로 차지하기 위한 양광의 야망은 결국 이루어지게 되었고 때를 보아 자객들을 시켜 부황을 결국 무참히 살해하고 자신이 황제의 자리에 오르게 된다.

드디어 양광은 612년에 고구려를 정복하기 위해서 무려 113만명이나 되는 군사들을 모두 총출동시켰다.

당 제국(唐 帝國)[+/-]

전기[+/-]

당 제국의 1대 황제인 이연(李淵)은 원래 수 제국의 지방 절도사를 겸임하고 있었으나, 수 제국이 자주 고구려를 포함한 이민족 국가들을 침범함으로써 국력이 약해지자 그 틈을 타서 반란을 일으킨다. 결국 수 제국은 이연의 반란에 의해서 망해버렸고, 이연은 새로이 당 제국을 수립하며 수도를 장안 특별시로 정했다. 당 제국은 중국 역사 중에서 가장 첫 번째로 번창했고 강대했던 제국이기도 하다. 그리고 여러 번의 개혁이 모두 성공한 덕분에 백성들로부터 큰 칭송을 받았던 제국이다.

이세민(李世民)은 아버지인 이연의 뒤를 이어 황제의 자리에 오른다.

무주 제국(武周 帝國)[+/-]

당 제국(唐 帝國)[+/-]

후기[+/-]

이렇게 혼란스러운 세상을 종식시킨 이융기(李隆基)는 다시 황좌의 자리를 차지하여 황제의 자리에 오른다.

그러나 이융기는 나이가 들어 말년에 노망이 나자, 자신이 가장 총애하는 양귀비에만 빠져 지내고 말았다.

송 제국(宋 帝國)[+/-]

전기[+/-]

송 제국의 1대 황제인 조광윤은 5호•16국 시대를 종결시키고 중국을 통일했다. 조광윤은 우선 수도를 카이펑 특별시(開封 特別市)로 옮기고 자신은 비록 무력으로 중국을 통일했지만, 정작 중요한 것은 문치인 것을 잘 알고 있었다. 그러니까 조광윤은 칼에 의한 정치보다는 붓에 의한 정치를 시행해야 한다는 주장을 강력하게 선포한 황제이기도 하다. 이 때문에 송 제국의 군대는 대부분 해체되었으며, 무관들은 문관들보다도 대접을 좋게 받지 못했다. 그리고 종전의 부병제보다는 모병제를 직접 채택함으로써 국방의 의무를 다 해야 한다는 부담감을 가진 백성들에게 어느 정도 칭송을 얻을 수 있었다. 그런 백성들은 전쟁에 대한 부담감 없이 문화를 발전시키는 데 큰 기여를 했다. 실제로 송 제국은 중국 역사 중에서 가장 첫 번째로 찬란한 문화가 발달했던 시기이다. 중국의 귀중한 유산들이 거의 송 제국 때 나왔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이다.

하지만 이러한 문치주의는 결국 국력의 급격한 쇠퇴를 낳기 시작했다. 국방력이 크게 약화되자 주변의 이민족들은 송 제국을 얕잡아보면서 끊임없이 침범하기 시작했다. 특히 변방 지역에서 강력한 세력을 보유한 거란족과 여진족과 몽골족의 침입이 극성했다. 이민족들은 송 제국에 함부로 침략하여 송 제국으로부터 자꾸만 이익을 챙겨가려고 했다. 이렇게 이민족들이 도발을 자꾸 하는데도 불구하고, 송 제국은 전쟁을 일으키려 하지 않고 이민족들에게 금은보화를 갖다 바쳐 전쟁을 면하려고 하였다. 이렇게 평화로만 제국을 지켜가려는 송 제국의 모습에, 이민족들은 더욱 기고만장하여 자꾸 송 제국을 침략하려고 했던 것이다.

후기[+/-]

결국 송 제국이 금 제국에 의해서 망해버리자, 송 제국의 황족들은 창 강(長 江) 이남 지역인 항저우 특별시로 피난하였고 항저우에 다시 송 제국을 세웠다. 조구가 새로운 황제의 자리에 올랐으나, 그도 겁이 많아서 우물쭈물한 사람이었기에 정치를 제대로 하지 못했다. 금 제국에게 자신의 제국이 멸망했음에도 불구하고, 금 제국과 싸울 생각은 하지도 않고 화친만 맺으려고 하였다. 이렇게 송 제국은 자꾸 화평만을 주장하는 대신들이 많이 생겨났고, 이들은 대부분 문인 출신들로 화평파로 불렸다. 그러나 중국의 자랑스러운 역사를 유지하기 위해서 오랑캐들과 싸워 이김으로써 자주권을 지켜나가는 것을 주장하는 대신들도 많았고, 이들은 대부분 무사 출신들로 주전파로 불렸다.

그 결과 송 제국에는 주전파와 화평파로 나뉘어 큰 싸움을 벌이고 있었다. 그런데 주전파에는 아주 뛰어난 대신이 있었는데, 그 사람은 바로 명군이자 충신인 악비! 악비는 무력과 지력이 모두 뛰어난 명장이었으며, 중국의 민족들의 자존심과 재건을 위해서 평생을 바친 영웅이었다. 한 때 엄청난 사기로 금 제국의 군대를 마구 무찔러 거푸 승리를 거듭했고, 잃어버린 송 제국의 영토를 거의 다 차지하는 업적을 이루었다. 그런데 그런 악비를 방해하는 어떤 불순한 세력이 들고 일어나기 시작하는데.

바로 황제과 황제을 모시는 고위 관리인 진회라는 자가 악비를 방해하였다. 이들은 악비와는 다르게 화평파에 속하여 전쟁을 벌이려고 하지 않았고, 주전파인 악비를 자꾸만 방해하여 악비가 거의 승리를 맞이했을 무렵 황궁으로 불러들여 악비가 공을 세우지 못하게 하였다. 그러다가 악비가 금 제국과의 전투에서 크게 승리하여 마침내 금 제국의 수도를 눈 앞에 두고 공격하려고 할 때, 마침내 황제은 진회의 말에 넘어가 악비를 황궁으로 불러들이고 말았다.

이후 악비는 1155년에 진회가 죽고 난 후 혐의가 풀리고 명예가 다시 회복되었으며, 1178년에 무목(武穆)의 시호를 받고 제국의 영웅으로 추앙받았다. 1204년에 추존되어 저장 광역성 항저우 시의 서호 부근의 악왕묘(岳王廟)에 묻혔으며, 뒤에 충무의 시호가 가증되었다. 반면 진회는 죽고 나서도

요 제국(遼 帝國)[+/-]

금 제국(金 帝國)[+/-]

근세[+/-]

원 제국(元 帝國)[+/-]

원 제국의 황제의 자리에 오른 쿠빌라이는 중국 역사상 첫 번째로 가장 큰 영토를 획득하게 된다. 중국 역사상 이민족 황국이 처음으로 등장했고, 바로 몽골족이 의해서 다스려지는 황국이었다. 쿠빌라이는 수도를 베이징 특별시()로 정했으며, 몽골 족을 상당히 우대하는 정책을 많이 폈다. 그리고 색목인이라고 해서 눈 색깔이 다른 민족들을 총칭하는 세력들을 그 다음으로 우수하게 대해준다. 색목인이란 한 마디로 한민 족이 아닌 다른 서양 세계의 사람들로 앵글로색슨 족과 게르만 족과 노르만 족 등을 총칭했다. 그 유명한 서양 세계의 사람인 마르코 폴로()도 색목인이었던 덕분에, 대원 제국의 황제으로부터 엄청난 인정과 보호를 받아가면서 원 제국에서 근무했을 정도였다.

그렇다면 한민 족과 창 강 남쪽 사람들은 어땠는가. 바로 몽골 족과 서양 세계의 사람들보다 대접을 받지 못한 짐승 같은 대접을 받으면서 살았다. 왜냐하면 알다시피 한민 족과 창 강 남쪽 사람들은 감히 원 제국에 맞서 싸우려고 했기 때문에, 원 제국의 황제는 이들을 억누르고 탄압하는 정책을 많이 썼다. 중국의 전통 민족인 한민 족이 최초로 이민족인 몽골 족에게 짐승 같은 대접을 받아 가면서 살았다니, 이는 중국 역사상 분명히 치욕적인 시대였을 것이다.

그러나 자랑스러운 중국 민족인 한민 족이 이대로 몽골 족에게 당하며 포기하고만 있지는 않았다. 속담에 이런 말이 있듯이, "칼은 붓을 자를 수 있지만, 붓을 가진 사람의 원통한 마음을 자를 수는 없다. 또 제 아무리 바람이 거세어도, 뿌리 깊은 나무는 결코 흔들리지 않는다.()"처럼 한민 족은 몽골 족에 대항하기 위한 계책들을 세우기도 했다. 비록 앞서 말했듯이 몽골 족의 포악한 정치는 한민 족들의 마음을 약하게 했지만, 그래도 한민 족은 중국 민족의 자랑스러운 민족이요 결코 호락호락하지는 않은 민족이었기 때문이다.

그것은 바로 대명절인 중추절()을 이용해서 몰래 쪽지를 돌려 대원 제국에 반란을 일으키는 방법을 모색해내기도 했다. 이것을 흔히 중추월병 전략이라고 불리며, 접시 맨 밑에 반란을 일으킬 것을 독려하는 종이를 놓고 그 위에 맛있는 떡들을 올려 종이가 원 제국의 첩자들에게 보이지 않게 했다.

명 제국(明 帝國)[+/-]

명 제국의 1대 황제인 주원장(朱元璋)은 홍건적으로서 크게 활동하다가, 끝내 백성들과 군인들의 지원을 받아서 원 제국을 멸망시킨다. 그리고 주원장은 당 제국 못지않을 정도의 찬란함을 가진 명 제국을 세우고 황제의 자리에 오른다. 참고로 주원장은 중국 역사상 두 번째로 평민 출신으로 황제의 자리에 오른 사람이기도 하다. 주원장은 우선 수도를 난징 특별시로 정했고, 백성들을 편히 쉬게 하는 한편 군사력을 강하게 하여 마침내 황허 강(黃河 江) 북쪽까지 진출하여 세력을 엄청 넓혀간다. 주원장은 정치 발전과 경제 발전 등 모든 면에서 통합적으로 발전을 시켜나갔다. 경제적으로는 당연히 창 강 쪽에 수도가 있었으므로 발전해나가는 데 큰 문제가 없었다. 창 강의 비옥한 영토에서 나오는 쌀과 보리와 소와 돼지 등 농산물과 축산물이 넘쳐났기 때문이다.

하지만 주원장은 황권에 도전하여 제국을 멸망시키려는 자들을 용서할 수 없었다. 즉 주원장은 모든 제국의 권력을 황제 자신으로 통일시켜 황제의 권력을 매우 강력히 하려고 하였던 것이다. 과거 찬란함을 유지했던 제국들이 결국 반란으로 망하였던 것을 잘 알고 있었던 주원장은, 제국을 말아먹고 자신들이 권력을 차지해 나가는 환관들을 억누르는 정책을 많이 썼다. 이 결과 죄 없는 대신들이 많이 처형되었고, 대신들은 주원장의 폭력 정치에 크게 실망하여 더 이상 황궁에 들어가지 않고 평민으로 살거나 스스로 목숨을 끊기까지 했다!

순 제국(順 帝國)[+/-]

명 제국에 반란을 일으킨 이자성(李自成)은 반역자라는 누명을 쓰면서까지 제국을 건립하기 시작한다. 수도는 시안 특별시로 정했으며, 자신에 대해 반대하는 자들은 가차 없이 사형시켜 자신의 권력을 강화하였다. 그리고 썩어가는 명 제국을 마구 공격하고 있는 여진 족과 연합하여 끝내 명 제국을 멸망시키는 데 일조하였다.

근대[+/-]

청 제국(淸 帝國)[+/-]

여진 족의 군주였던 누르하치는 순 제국의 황제인 이자성을 이용하여 세력을 크게 키워나간다. 그러는 한편 명 제국이 망하자마자 몰래 자신들만의 황국인 청 제국을 설립하고 황제의 자리에 올랐다. 수도 베이징 특별시를 점령한 여진 족들은 우선 백성들을 안심시키는 한편, 명 제국의 반역자 이자성을 끝까지 추적하여 마침내 이자성을 붙잡아 처형하는 데 성공한다. 청 제국 역시 원 제국 때처럼 이민족 황국이었으나, 여진 족은 몽골 족과는 차원이 달랐다. 우선 여진 족은 중국의 전통 민족인 한민 족들을 회유하는 정책들을 많이 이용했다.

하지만 청 제국의 황제은 이 정도로 안심할 수 없었다. 바로 과거 원 제국 때문이었는데, 비록 대원 제국이 무력으로 중국을 점령했다고는 하지만, 결국 찬란한 중국의 문화에 이끌려 몽골 족 자신의 문화가 잊혀져 버리는 끔찍한 사건이 있었기 때문이었던 것이다. 결국 대청 제국은 이러한 실수를 반복하지 않기 위해서,

현대[+/-]

중화민주공화국[+/-]

드디어 신해혁명이 성공적으로 끝났고, 중화민주공화국의 황제의 자리에 오른 푸이은 우선 수도를 난징 특별시로 정하고 중국에 민주주의와 자본주의를 널리 퍼뜨린다. 손문은 중화민주공화국의 대천황의 자리에 오르자마자 대국민들을 위한 정책을 많이 펼쳤으며, 그들이 생활면에서 전혀 불편함이 없게 최대한으로 좋게 정치를 하였다. 오늘날에도 손문은 '중화민주공화국의 아버지'라고 불릴 정도로 매우 유명한 사람이다. 게다가 손문은 동양 세계에서 첫 번째로 중화민주공화국이 민주 공화국이 되게 한 장본인이기도 하다.[3]

장개석은 중화민주공화국을 더욱 현대적으로 발전시키기 위해서 뛰어난 정책을 펼쳤으며, 그 결과 중화민주공화국은 나날이 발전해나가기 시작한다. 그러는 한편 자신의 최대 적이자 국민당의 주적인 공산당을 멸망시키기 위해서 모택동과 그를 따르는 대신들을 모조리 죽여 버리려는 전략도 시행했다. 공산당은 국민당보다 군사적으로도 밀렸고 게다가 무기조차 변변치 못해서 국민당이 제대로 공격을 하면 공산당은 완전히 멸망할 것 같았다.

중화인민공화국[+/-]

국민당이 한창 중국에서 엄청난 세력을 과시하고 있을 무렵, 느닷없이 모택동을 중심으로 한 공산당이 반란을 일으켜 베이징 특별시를 무력으로 점령해버린다. 한편 장개석은 중화민주공화국과 전쟁을 일으킨 일본 제국에 대항하여 끝까지 싸워 나감으로써 마침내 일본 제국을 크게 무찔러, 일본 사람들을 모조리 쫓아내거나 처참하게 죽여버리는 큰 공을 세운다.

신화적 자료[+/-]

고대[+/-]

중세[+/-]

근세[+/-]

근대[+/-]

현대[+/-]

주석[+/-]

  1. 사실 사마의는 반역을 할 생각이 없었으나, 이는 대촉 제국이 위 제국을 공격하기 위해서 대촉 제국의 대승상인 제갈량이 자신에게 위협을 가하려는 사마의를 미리 방해하기 위한 계책이었던 것이다. 즉 첩자들을 이용하여 대위 제국의 영토 곳곳마다 사마의가 반역을 꾀한다는 공문을 퍼뜨려, 결국 대위 제국의 대천황이 이를 알아채고 사마의를 파직시킨 것이었다.
  2. 사실 관우가 죽은 이유는 당시 위 제국의 황제였던 조조의 계책에 의해서 오 제국과 촉 제국이 서로 싸우도록 만들었기 때문이었다. 안 그래도 영토 반환 문제로 오 제국과 촉 제국은 서로 신경전을 펼치고 있었는데, 오 제국의 승상인 여몽이 촉 제국에 의해 빼앗긴 영토를 돌려받기 위해서 계책을 썼고, 마침내 전쟁에서 관우를 전사하게 만든 것이다. 이 때문에 오 제국과 촉 제국의 관계는 더욱 험악해졌다.
  3. 참고로 전 세계 및 서양 세계에서 첫 번째로 민주 공화국이 된 대제국은 아메리카 미합중국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