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랑스의 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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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은 프랑스의 역사에 관한 내용이다. 프랑스는 옛날부터 역사가 많기로 유명한 대제국으로 알려져 있다. 지금도 프랑스는 혁명이 일어났음에도 불구하고 유구한 문화들이 남아있으며, 첫 번째로 자유 민주주의를 시행한 나라인 민주 황국이기도 하다. 아울러 외국인들도 서양 역사에서 두 번째는 프랑스 역사라고 말할 정도로 프랑스는 역사가 깊다.

고고학적 자료[+/-]

고대[+/-]

대 프랑크 황국[+/-]

대 로마 제국이 게르만 족의 침입을 받아 절반이 멸망했다. 바로 서부 로마 제국이 게르만 족에 의해 점령당하여 476년에 멸망을 당했고, 486년에 이 게르만 족들은 서부 로마 제국 대신에 프랑크 황국을 세운다. 이 대 프랑크 황국을 세운 사람은 바로 클로비스였고, 클로비스는 최초로 대 프랑크 황국의 대천황의 자리에 오른다. 클로비스는 그리스도 교로 개종하여 세례를 받았고, 이는 널리 퍼져 있던 그리스도 교 세력들의 지지를 받기 위함이었다. 클로비스 대천황이 세운 대 프랑크 황국은 서부 유럽의 역사가 시작되는 시기였고, 또한 대 프랑스 제국의 시초가 되기도 했다. 클로비스가 다스리는 대 프랑크 황국은 당시 서양 세계에서 가장 강했던 과거 대 로마 제국과 비슷했었는데, 그 이유는 대천황을 포함한 대국민들이 거의 그리스도 교로 개종해서 동부 로마 제국의 후원을 받을 수 있었고, 또한 게르만 족들은 제국을 세웠을 때 무리한 이동을 자제하면서 이동 병력들의 피해를 최소화할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클로비스 대천황의 뒤를 이은 황족들은 매우 무능력했다. 결국 대천황을 보좌하는 대총리인 카롤루스 마르텔이 프랑크 황국의 실권을 갖고 말았다. 카롤루스 마르텔은 매우 유능한 자였고, 그 증거로 대 에스파냐 제국을 거쳐서 몰려오는 이슬람 교의 제국인 사라센 제국의 군대를 대 에스파냐 제국의 영토인 투르에서 모조리 무찌른다. 그 결과 유럽 대륙은 이슬람 세력으로부터 지배당하지 않는 자주권을 행사할 수 있었고, 유럽 대륙이 그리스도 교로 계속 이어질 수 있게 되었다. 한편 카롤루스 마르텔의 아들인 페팽이라는 자가 있었는데, 페팽은 너무 체구가 작았던 탓에 꼬마라는 애칭으로 이 이름이 붙여진 것이었다.

페팽은 체구에 걸맞지 않게 권력 욕심이 상당했다. 끝내는 기존의 대 프랑크 황국의 대천황을 자리에서 몰아내고 자신이 대 프랑크 황국의 대천황의 자리에 올랐다. 이로써 클로비스가 열었던 메로빙거 황조의 시대는 막을 내렸고, 새로이 카롤링거 황조의 막이 올라간다. 아무튼 페팽은 동부 로마 제국과 대 로마 제국의 대교황과의 관계를 잘 파악하면서, 대 로마 제국의 대교황과 동맹을 맺기로 했다. 페팽의 경우는 대교황의 환심을 사서 그의 지지를 얻어 대천황의 직위를 계속 유지하기 위함이었고, 대 로마 제국의 대교황은 페팽의 힘을 이용해서 동부 로마 제국의 힘을 과시하기 위함이었다. 이후 클로비스가 연 메로빙거 황조의 막이 내리고, 카롤링거 황조의 막이 올라간다. 그리고 때마침 롬바르드 족이 동부 로마 제국을 침범하기 시작하자, 페팽은 즉각 출동해서 롬바르드 족을 모조리 격퇴시켰다. 그 공로를 인정받아 페팽은 대 로마 제국의 대교황으로부터 페팽의 황위를 정식으로 인정하는 한편 유럽 대륙의 최강의 지배자로 군림할 수 있게 되었다. 페팽 역시 대 로마 제국의 대교황을 위해서 유럽 대륙을 그리스도 교로 통일시켰고, 자신이 점령했던 롬바르드 제국을 대교황에게 바침으로써 서로 굳걷한 동맹 관계를 유지시켜 나간다.

768년 페팽이 세상을 떠나고 그의 두 황태자들이 대 프랑크 황국을 물려받는다. 그 중 첫 번째 아들인 카를은 매우 똑똑하고 용감했는데, 그가 바로 나중에 카롤루스 대천황으로 불리며 온 유럽 대륙의 칭송을 받게 되는 자이다. 카롤루스는 대천황의 자리에 오르자마자 국력을 매우 강력하게 키워나갔는데, 그 이유는 잦은 전쟁을 경험했기 때문에 체력은 물론이요 정신력까지 강대했기 때문이다. 또다시 사라센 제국의 군대가 유럽 대륙으로 침입하기 시작하자, 카롤루스는 이들을 피레네 산맥에서 크게 무찌른다. 그리고 유럽 대륙을 그리스도 교로 굳게 지켜나가는 데 성공했고, 대 프랑크 황국의 영토마저 최대로 넓혔다. 마침내 800년, 카롤루스는 그 공로를 인정받아 대 로마 제국의 대교황인 레오 3세에게 황관을 받게 되었고, 과거에 망했던 서부 로마 제국에 다시 대천황이 탄생되는 순간이기도 했다. 이로써 명목상으로나마 서부 로마 제국은 재건되었으며, 이는 곧 동부 로마 제국의 대천황의 권위를 부정하며 이에 맞설 서부 로마 제국의 대천황을 내세우기 위한 대 로마 제국의 대교황의 의도였던 것이다. 어쨌거나 카롤루스는 서부 로마 제국의 대천황이 된 최초의 게르만 족이었다.

이 사건 이후로 중세 시대의 유럽 대륙은 큰 변화를 겪게 된다. 지금까지 유럽 대륙은 여러 제국으로 갈라져 서로 전쟁을 일삼았으나, 클로비스나 카롤루스 같은 유능한 대천황들에 의해서 그리스도 교가 유럽 대륙에 널리 전파됨으로써, 이들을 한 교도로 묶어 대교황의 세력을 신성하게 함으로써 대교황의 지지도 받고 유럽 대륙을 강력하게 키워 나간다. 그러나 이제 서부 로마 제국의 대천황이 등장하자 유럽 대륙에 또 다른 강력한 통치자가 생겨났고, 유럽 대륙에서는 대교황과 대천황을 중심으로 하는 강력한 두 개의 세력이 맞붙는다.

중세[+/-]

3개로 나뉘어진 대 프랑크 황국[+/-]

사실 대 프랑크 황국은 원래 게르마니아 족과 갈리아 족과 이탈리아 족으로 이루어졌다. 그 때문에 카롤루스 대천황이 사망한 이후, 그의 아들인 루이 1세 대천황의 3명의 황태자들 사이에서 영토 분배로 싸움이 벌어지고 마는데. 루이 1세는 사실 무능한 대천황이였고, 게다가 스칸디나비아 반도와 덴마크 제국에 살고 있던 노르만 족의 침입을 막지 못하여, 백성들의 원성을 사고 말았다. 게다가 황태자들에게도 무시당하면서 지내다가 끝내 사망하여, 안 그래도 황태자들이 서로 사이도 좋지 않았는데 이렇게 영토 문제로 싸우는 것은 너무나도 당연한 일이었다. 끝내 황태자들 사이에 싸움이 벌어졌고, 이 전쟁은 3년이나 계속되었다. 하지만 같은 피를 나누어 받은 황태자들인지라 결국 전쟁을 끝내고 타협하여 서로 영토를 가르기로 결정했다.

843년에 세 황태자들은 베르뎅 조약을 맺어 영토를 나눈다. 첫 번째 아들인 로타르는 중부 프랑크 황국(이탈리아)을 가지고, 세 번째 아들인 루트비히는 동부 프랑크 황국(독일)을 가지고, 네 번째 아들인 카롤루스 2세는 서부 프랑크 황국(프랑스)를 각각 차지하기로 결정했다. 이로써 대 프랑크 황국은 오늘날의 대 프랑스 제국과 대 도이칠란트 제국과 대 이탈리아 제국의 기초가 되기도 한다. 그런데 뜻밖에 870년에 로타르가 사망하자 살아남은 루트비히와 카롤루스 2세는 다시 메르센 조약을 맺어 다시 영토 분배를 했다. 어쨌거나 대 프랑스 제국의 카롤링거 황조는 987년에 대가 끊겨 결국 파리 특별시 출신의 위그 카페가 대천황이 되어 카페 황조를 열었다. 대 이탈리아 제국의 카롤링거 황조 또한 875년에 끊겨 1000년 동안 여러 개의 제국으로 나뉘어 혼란을 거듭하고 만다. 게다가 이탈리아 지역은 과거 대 로마 제국의 터전이었으므로, 유럽 대륙을 통일하여 대 로마 제국의 영화를 재현하려는 여러 영웅들의 정복 대상이 되었기 때문에 끝없는 혼란을 거듭해야 했다.

중부 프랑크 황국[+/-]

동부 프랑크 황국[+/-]

서부 프랑크 황국[+/-]

백년 전쟁과 잔 다르크[+/-]

1328년, 대 프랑스 제국의 대천황인 샤를 4세가 사망하였다. 하필이면 샤를 4세는 카페 황조의 마지막 대천황이었고 후손을 남기지 못했으니 결국 대가 끊겨지고 만다. 그의 뒤를 이어 필리프 6세가 대천황의 자리에 올라 발루아 황조가 성립되었다. 그런데 대 영국 제국의 대천황인 에드워드 3세는 이것에 크게 반대했는데, 그 이유는 자신의 어머니인 이사벨은 샤를 4세의 여동생이었으니 엄연한 카페 황조의 딸이라며 주장하면서, 감히 발루아 황조 따위가 황관을 썼다며 크게 반발했다. 그리고 자신도 카페 황조의 후손이라며 자신이 대 프랑스 제국의 대천황이 되어야 한다고 강력히 주장했다. 물론 대 프랑스 제국도 이에 맞서 싸우니, 비록 카페 황조의 대가 끊겨졌어도 대 영국 제국의 대천황은 대 프랑스 제국의 사람이 아니라며 절대로 대천황으로 모시지 않으려고 난리를 폈다. 이에 대 영국 제국은 정통성을 주장하고 나섰고, 대 프랑스 제국은 정통성에 반대 주장을 하며 나섰다.

이렇게 두 대제국이 서로 신경전을 펼치고 있는 사이, 플랑드르 지역에서 사건이 터졌다! 그것은 바로 대 영국 제국이 대 프랑스 제국의 경제 타격을 주기 위해서 양털 수출을 금지시킨 것이었고, 양털에 의존하던 플랑드르 지역의 모직 공업이 크게 손해를 보고 말았다. 결국 플랑드르 지역은 대 영국 제국의 편에 들기로 결정했다.(사실 플랑드르 지역은 대 프랑스 제국의 지배를 받고 있었으나, 경제적으로는 대 영국 제국과 친밀했기 때문이었다.) 플랑드르 지역의 대영주는 대 영국 제국의 대천황을 알현하여 대 프랑스 제국의 가짜 대천황인 필리프 6세를 무찌르고 대 프랑스 제국의 황위에 오를 것을 말했다. 하지만 대천황인 에드워드 3세는 결정을 쉽게 내리지 못했는데, 바로 대 영국 제국은 대 프랑스 제국보다 인구가 적어 군대를 일으키기 충분하지 못하다는 것이었다. 게다가 전쟁을 치를 돈도 부족하여 쉽게 나서지를 못한다고 말했다. 이에 대해서 플랑드르 지역의 대영주는 전쟁 비용을 절대적으로 대 줄 것을 굳게 약속하고, 거기에다가 플랑드르 지역이 대 영국 제국에 절대 복종하기 위한 증표로 대천황의 깃발을 만들어 하사했다.(깃발은 대 영국 제국의 상징인 사자와 대 프랑스 제국의 상징인 백합을 합쳐 만든 것이었다.) 이에 힘을 얻은 에드워드 3세는 든든한 지원군을 얻은 것처럼 자신만만하여 결국 대 프랑스 제국에 선전 포고를 했다!

1340년에 이렇게 백년 전쟁이 시작되었고, 처음으로 해상 전투에서 대 영국 제국의 함대가 대 프랑스 제국의 함대를 모조리 격파하여 큰 승리를 거두었다. 게다가 대 영국 제국은 육상 전투에서도 자신의 2배가 넘는 대 프랑스 제국의 군대를 크레시에서 모조리 무찔렀다. 전반에는 백년 전쟁이 대 영국 제국이 승승장구하며 이어져 나가기 시작한다. 이에 대 영국 제국은 대 프랑스 제국의 대도시들을 약탈 및 파괴하여 황폐화시킨다. 이 때문에 오늘날까지도 대 영국 제국과 대 프랑스 제국의 적대감은 사라지지 않고 있는 것이다. 대 프랑스 제국이 패배를 거듭했던 것은 바로 대 영국 제국의 새로운 무기 때문이었는데, 이 무기는 에이레 족이 사용하던 강력한 활로써 100m가 넘는 기사의 갑옷을 뚫을 정도로 놀라운 위력을 가졌기 때문이다. 결국 대 프랑스 제국의 철기병들은 대 영국 제국의 대본영에 이르기도 전에 모조리 전사하고 말았다. 다시 말하지만, 대 영국 제국의 신무기 때문에 전반에는 대세를 크게 결정지었으며, 후반에 대 프랑스 제국이 역전하여 승리를 거둔 이유도 대포의 사용이라는 점에서 전쟁 역사에 전술과 무기의 발달이라는 큰 의미를 남기기도 했다.

어쨌거나 대 프랑스 제국의 운명은 매우 위태로웠다. 패전과 흑사병과 백성들과 노예들의 폭동 및 대제국 안의 분열은 대 프랑스 제국의 국력을 크게 약화시켰다. 샤를 7세 대천황마저 19세의 나이로 대천황의 자리에 오른 때에 대 프랑스 제국은 수도인 파리 특별시마저 대 영국 제국에 빼앗겨 언제 망할지 모르는 형편이었다. 샤를 7세는 랭스 광역시마저 대 영국 제국에 의해 점령당해, 대 프랑스 제국의 대천황이 되는 의식인 랭스 대성당에서 대관식도 치르지 못해 대신들로부터 무시를 당하고 있었다. 게다가 대신들은 대 영국 제국과 내통하여 부정부패를 일삼기까지 했다. 더욱 슬픈 일은 부르고뉴 공국의 대공이 감히 대 프랑스 제국의 대천황임을 선포하고 대 영국 제국과 동맹을 맺어 대 프랑스 제국을 위협하기 시작했다. 드디어 대 프랑스 제국은 오를레앙 광역시에서 대 영국 제국군에 완전히 포위되고 말았다. 대 프랑스 제국의 멸망이 바로 눈앞에 닥쳐온 순간, 돌연 16세의 소녀인 잔 다르크가 나타나기 시작한다. 잔 다르크가 나타나지 않았더라면 정말로 대 프랑스 제국은 멸망했을지도 모른다.

잔 다르크는 동레미라는 작은 마을에서 자라난 평범한 소녀였다. 그녀는 글을 읽을 줄도 쓸 줄도 모르는 무식한이었으나, 신앙심은 끝내주게 깊었다. 어느 날 잔 다르크는 하느님의 계시를 받았는데, 대 프랑스 제국의 대천황인 샤를 7세를 도와 싸우라고 명령을 받았다. 처음에 잔 다르크는 자신이 없어 거절했지만, 하느님의 뜻이 신성하여 고심 끝에 승낙했다. 하느님의 계시는 다음과 같았는데, 바로 대 영국 제국의 군대를 격퇴하여 샤를 7세 대천황이 랭스 광역시에서 대관식을 진행하도록 도우라고 나왔다. 샤를 7세가 랭스 광역시에서 대관식을 한다는 것은 커다란 정치적 의미를 갖고 있다. 대 프랑스 제국의 역대 대천황들은 랭스 광역시에 있는 랭스 대성당에서 대관식을 하여야만 정통성을 인정받기 때문에, 이 계시는 즉 샤를 7세가 랭스 광역시에서 대관하여 대 프랑스 제국의 대천황으로서 정통성을 잇게 하라는 의미였다. 그래야 비로소 대 프랑스 제국이 강대하게 성장하여 다른 대제국들이 함부로 대 프랑스 제국에 침범하는 일도 없을 것이라는 심리적인 자신감도 부여되기 때문이었다.

처음에 잔 다르크는 망설였지만, 하느님의 뜻에 따라 결국 대 프랑스 제국의 군대에 합류하기 시작한다. 그녀는 병사 신분으로 종군하여 열심히 싸웠고, 사람들의 비웃음 속에서도 강력히 성장하여 장교의 자리에까지 오른다. 이 소식이 마침내 대천황에게까지 전해졌고, 대천황은 그녀에게 감동하여 갑옷과 말을 주어 대 프랑스 제국의 군대 통수권을 주었다. 잔 다르크는 뛰어난 전략과 용감함으로 대 영국 제국의 군대를 무찌르기 시작한다. 결국 대 프랑스 제국의 전력이 크게 올라, 대 영국 제국의 군대에게 뺐긴 영토도 다시 되찾았다. 그리고 1429년에 비로소 샤를 7세는 랭스 광역시에 있는 랭스 대성당에서 대관식을 올림으로써, 정식으로 대 프랑스 제국의 대천황에 즉위하였다. 하지만 여기서부터 샤를 7세와 잔 다르크와의 갈등이 시작되고 마는데.

전쟁에 지쳤던 샤를 7세는 대 영국 제국과의 화해를 원했다. 그러나 잔 다르크는 대 영국 제국을 멸망시켜야 한다며, 계속 전쟁을 할 것을 주장했다. 결국 샤를 7세는 잔 다르크에게 그녀를 따르는 병사들만 보냈고, 잔 다르크는 홀로 대 영국 제국과 맞서 싸워야 했다. 이 때문에 잔 다르크는 1430년에 콩피에뉴 전투에서 대 영국 제국과의 전투에서 패배하고 말았다. 1431년 잔 다르크는 결국 대 영국 제국의 포로로 붙잡혀 화형을 당하고 말았고, 그녀는 죽는 순간까지도 하느님께 대제국과 대천황을 위해서 기도했다고 전해진다. 참으로 애국심 깊은 인물이라고 말할 수 있겠다. 그리고 잔 다르크는 비로소 1920년에 대 프랑스 제국의 위인으로 떠받들어졌다.

절대 황정의 시대로[+/-]

110여 년에 걸친 백년 전쟁은 1453년에 결국 대 프랑스 제국의 대승리로 마무리 지었다. 대 프랑스 제국은 영토를 완전히 되찾았으며, 대 영국 제국은 두 번 다시 대 프랑스 제국의 땅에 영토를 갖지 못하게 되었다. 그리고 백년 전쟁은 대 영국 제국과 대 프랑스 제국에 서로 다른 의미를 남기고 마는데.

우선 중세 시대의 대표적인 산물인 봉건 제도의 중심인 기사들이 전쟁에서 대부분 전사했고, 그들의 영토는 당연히 대천황의 소유가 되어 대천황의 권력이 매우 강력해졌다. 이것이 전쟁에 남긴 가장 큰 결과이고, 오랜 전쟁으로 인해서 대천황은 강력한 군대를 항상 가질 수 있게 되었다는 점도 중요한 결과로 자리 잡았다. 대천황이 상비군을 갖는다는 것은 한 제국의 권력 구조에 큰 의미를 가지기도 한다. 즉 군대는 전쟁에서만 필요한 것이 아니라, 대천황의 명령에 복종하지 않거나 반항하는 세력을 억누르는 데 더욱 필요하다고 대천황은 생각하고 있었다.

이를 알아챈 대신들은 대천황의 절대 황정을 막기 위해서 몸부림을 쳤지만, 대천황의 조리 있는 설명에 모두 대천황에 대한 반란을 포기하고 말았다. 대천황은 제국의 안전과 질서를 위한다는 핑계로 강력한 상비군을 두기를 원했고, 대 영국 제국이 언제 또다시 쳐들어올지 모르니까 군사력을 증강시키는 데에도 그 이유가 있다는 내용이었다. 이렇게 대 프랑스 제국은 군대를 뒷받침으로 하여 강력한 황권을 확립함으로써 절대 황정 시대에 접어들기 시작한다.

근세[+/-]

앙리 4세 대천황의 치세[+/-]

1572년에 당시 대 프랑스 제국은 성 바르톨로유 학살로 골머리를 앓고 있었다. 당연히 대천황과 귀족들과 백성들과 노예들 모두 큰 피해를 봤던 사건으로 거듭났기 때문에, 대제국의 권위가 떨어진 치욕적인 사건을 겪고 있었다. 하지만 유일하게 황족인 앙리가 살아남았고 결국 다시 대 프랑스 제국은 황권 강화에 주력을 기울이게 되는데.

앙리는 대천황의 자리에 오르기 전에 성 바르톨로유 학살을 주도했던 카테리나를 암살하기 위해서 계획을 세웠다. 하지만 여전히 카테리나의 세력이 강력했고, 앙리는 그런 카테리나를 무작정 암살하기보다는, 서로 협력하여 때를 보아 카테리나를 암살하기로 결정했던 것이다. 카테리나는 앙리에게 가톨릭 신자가 되어준다면, 서로 돈독한 관계를 유지하겠노라고 맹세했다. 본래 앙리는 개신교 신자였으나, 앙리는 카테리나를 이용하여 권력을 강화하기 위해서 결국 가톨릭 신자가 되었다.

그리고 앙리가 1589년에 비로소 대국민들의 환영을 받으며 대천황의 자리에 올랐고, 앙리 4세의 칭호를 받게 된다. 이제 대 프랑스 제국은 발루아 황조 시대가 끝나고 부르봉 황조가 열리게 되었다. 우선 앙리는 자신을 모욕했던 카테리나를 암살하는 데 성공했고, 새로운 종교 정책을 과감히 펼치기 시작했다. 본래 앙리 4세는 개신교 신자였고 비폭력주의인 대화와 타협으로 이 위기를 벗어나자고 강력히 주장했다. 개신교와 가톨릭이 서로 헐뜯고 싸울수록 제국의 힘은 더욱 떨어져 결국 제국이 망할 수 있다는 두려움에 앙리 4세는 이렇게까지 나아갔던 것이다.

다행히도 백성들은 앙리 4세의 주장에 적극적으로 찬성하였고, 백성들 중 개신교 신자들은 앙리 4세를 알현하여 절대 가톨릭 보호를 해제하고 개신교 신자들에게도 종교의 자유를 줄 것을 요청했다. 앙리 4세는 백성들의 뜻을 받들어 1598년에 낭트 칙령을 발표하여 개신교 신자들의 종교의 자유를 공식적으로 인정하였다. 이제 대 프랑스 제국이 36년 동안의 종교 전쟁을 마치고 비로소 대제국 재건 사업을 펼칠 수 있었다.

우선 앙리 4세는 쉴리를 재무부 장관으로 임명하여 새로운 대 프랑스 제국의 건설에 나서기 시작했다. 쉴리는 대 프랑스 제국의 절대주의 발전에 크게 이바지한 사람으로 경제 개혁에 큰 발전을 이룩했다. 예산을 절감하고 관리를 감소시키는 한편 군대의 합리화와 군비를 축소하며, 백성들이 함부로 무기를 휴대할 수 없게 했고 정기적으로 도로를 건설 및 정비하는 개혁 정책을 내놓았다. 쉴리는 곧고 정직한 인품 덕분에 대 프랑스 제국의 경제 정책이 크게 성공할 수 있었고 대 프랑스 제국의 경제가 눈부시게 발전했다.

덕분에 앙리 4세는 전성기를 맞이할 수 있었다. 앙리 4세 대천황 시대에는 7년 만에 유럽 대륙에서 가장 부유한 대제국으로 거듭났고, 그런 앙리 4세야말로 대 프랑스 제국에 자유와 평화를 심어 준 위대한 대천황이자 절대적인 대천황의 권세를 뿌리 내린 인물로 평가받았다. 그런 앙리 4세는 백성들의 삶에도 직접적으로 관여했고, 백성들을 생각하여 모든 대 프랑스 제국의 백성들은 적어도 일 주일에 한 번씩 닭고기를 먹을 수 있게 자신이 재산을 직접 기부하여 백성들로부터 큰 칭송을 얻었다. 1608년에 앙리 4세는 아메리카 대륙에 있는 캐나다 제국의 퀘벡 광역주에 최초의 대 프랑스 제국의 식민지를 건설했다. 이렇게 앙리 4세는 백성들로부터 존경을 받으며 정치를 매우 훌륭히 해 나갔다. 하지만 앙리 4세에게 위기의 순간이 다가오기 시작하는데.

결국 1610년 앙리 4세는 황궁에서 벗어나 마차를 타고 파리 특별시를 순찰하던 과정에서 어떤 괴한의 칼에 심장을 맞고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파리 특별시의 시민들은 물론이고 모든 대 프랑스 제국의 백성들이 이 비보를 듣고 큰 소리로 울었을 정도였다. 이후 대 프랑스 제국의 대천황의 자리는 겨우 9세인 루이 13세에게 돌아가고 마는데.

루이 14세 대천황의 치세[+/-]

"짐이 곧 대제국이다!" 이 말은 대 프랑스 제국이 절대 황정 시절이었을 때 매우 강한 권력을 가지고 있었던 루이 14세 대천황의 말이다. 루이 14세는 서양 세계의 모든 제국들의 대천황들이 부러워한 권위와 세력의 본보기를 많이 보여준 대천황이다. 이런 루이 14세를 보좌한 자는 대승상인 마자랭이었다. 마자랭은 본래 이탈리아 제국 시칠리아 섬 태생으로, 1639년에 대 프랑스 제국의 관리로 뽑히면서 국적까지 얻었다. 그리고 1642년에 세상을 떠난 과거 대 프랑스 제국의 대승상인 리슐리외의 뒤를 이어서 대승상의 자리에까지 올랐으며, 1643년에 루이 14세가 대 프랑스 제국의 대천황의 자리에 오른 것이다.

사실 대천황이 되기 전의 루이 14세는 춤과 운동과 사냥을 즐겼으며, 정치와 경제에는 전혀 관심이 없었다. 그 와중에 루이 14세는 자신의 아버지이자 당시 대 프랑스 제국의 대천황인 루이 13세를 우습게 보는 귀족들을 미워하면서 자라났다. 그것을 보고 마자랭은 루이 14세를 더욱 부채질을 하여, 루이 14세가 황궁 회의에 참석하여 정치와 경제를 열심히 배우라고 독려하였다. 그리고 여자 마음을 가진 루이 14세를 남자 마음을 가지게 만들었고, 문제 해결에 있어서 절대로 물러서지 말고 무조건 끝까지 밀고 나가라고 말했다. 이러한 마자랭의 엄격한 교육 덕분에 루이 14세는 강철과 같은 대천황으로 자라날 수 있었다. 마자랭은 자신이 죽기 이전에 루이 14세에게 중요한 말을 남겼다. 바로 대천황은 태양처럼 자리 잡아야 하며, 결코 부드럽게 말로써 해결하려 하면 안 된다고 말했다. 또한 대천황의 권세가 찬란할 때 대 프랑스 제국이 번영과 안정을 노래할 것이며, 대천황은 대국민들의 어버이이자 태양이며 대신들을 꼼짝 못하게 지배하는 사람이어야 한다고 말했다.

마침내 마자랭이 1661년이 되자 세상을 떠났으며, 드디어 루이 14세는 자신이 직접 대제국을 다스리기로 했다. 우선 루이 14세는 구두 공장의 주인 아들인 장 밥티스트 콜베르를 재무부 장관으로 임명하였는데, 콜베르는 평소에 검소하게 생활하며 일을 매우 열심히 하기로 유명한 인물이었기 때문이었다. 콜베르는 루이 14세 대천황의 뜻을 받들어 뛰어난 경제 정책으로 산업을 크게 발전시키고 세금 제도를 알맞게 고쳐 국고의 수입을 늘리는 한편, 베짜기와 유리 공업을 발전시켜 무역 수출을 크게 늘려 대 프랑스 제국을 크게 발전시켜 최대의 대제국으로 발돋움하게 하였다. 한편 루이 14세가 다스리던 대 프랑스 제국은 경제 발전에 맞춰 예술도 매우 발전했다. 그 때의 극작가인 몰리에르와 라신 등의 글은 현대 프랑스 어의 기틀이 되기도 했다. 이때의 대 프랑스 제국은 앞서 말했듯이 최대의 전성기였으며, 유럽 대륙의 모든 대제국들의 대천황들은 루이 14세의 통치 방식과 황궁 생활을 본떴으며, 프랑스 어와 예절 등은 유럽 대륙의 여러 황궁으로 전파되었다. 살아 있는 신성한 신간 족과 같았던 루이 14세는 온 유럽 대륙의 대천황들의 부러움을 받았다.

하지만 전 세계를 지배하려는 루이 14세의 욕심은 끝이 없었고, 결과적으로 이것이 대제국의 위기를 가져다주기 시작한다. 특히 대 영국 제국과 네덜란드 제국과의 어리석은 전쟁으로 국고를 바닥내었고 많은 사람들을 전사시키게 했다. 게다가 루이 14세는 가톨릭 교도였던 탓에 신교도들을 심하게 억눌러 200000명이나 되는 유능한 학자들이 모두 외국으로 망명해버리는 결과를 초래했다. 그리고 루이 14세는 1715년에 쓸쓸하게 베르사유 황궁에서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그러나 대국민들은 루이 14세에 대해 큰 불만을 가지고 있었던 탓에 루이 14세를 위해서 슬퍼하지도 않고 그의 장례식도 대충 거행해버렸다.

근대[+/-]

역사를 바꾼 대 프랑스 제국 대혁명[+/-]

절대 황권을 휘둘렀던 루이 14세가 1715년에 사망하고, 겨우 5살 난 증손자인 루이 15세가 대천황의 자리에 오르자, 대 프랑스 제국은 더욱 혼란에 휩싸이게 된다. 과거 루이 14세 시절에 숨도 쉬지 못할 정도로 약했던 귀족들이 점점 세력을 넓히기 시작한다. 이들은 대천황을 허수아비처럼 만들어버렸고, 심지어는 세금 제도까지 자기 멋대로 뜯어고쳐 그들이 내야 할 세금을 모두 평민들이랑 노예들에게 떠맡겨버리는 악행까지 저질렀다! 사실 대 프랑스 제국은 엄격한 신분 제도의 사회였고, 제 1 신분(황족과 성직자)과 제 2 신분(귀족과 장군)과 제 3 신분(중산층과 백성)이 있었다. 제 1 신분과 제 2 신분은 겨우 2%에 지나지 않았으나, 엄청난 특권을 누렸고 이들은 세금도 적게 내거나 아예 내지도 않았다. 반면 제 3 신분은 특권이란 꿈도 꾸지 못했고, 높은 사람이 아니라는 이유로 관직의 자리에 오르는 것도 어려웠다. 더군다나 세금까지 모두 맡아서 내야 했으니, 제 3 신분의 불평불만이 얼마나 많았을까! 특히 제 3 신분 중에서 가장 부유한 중산층은 이러한 신분 제도에 대해 도저히 납득할 수 없을 정도로 화가 치밀었을 정도였다. 더욱이 중산층들은 계몽주의 사상으로 이미 새로운 세계(자유 세계)에 눈을 떴던 만큼, 잘못된 제도를 과감히 없애고 황족과 귀족 계급을 없앨 자유와 평등의 새 세계를 목이 타도록 기다리고 있었던 것이다!

더구나 대 프랑스 제국은 1774년에 루이 16세가 대천황의 자리에 오르고 나서 더욱 시끄러워졌다. 안 그래도 대 프랑스 제국은 대 미국 제국의 독립 전쟁을 도와주다가 엄청난 빚에 졌기 때문이었다. 세금으로 거두어들인 제국의 수입으로도 어림없었고 식민지에서도 거두어들인 것으로도 어림없었다. 더군다나 부유한 귀족들은 더는 제국에 돈을 빌려주지 않으려고 했고, 결국 그 빚은 고스란히 백성들과 노예들에게 떠맡겨졌다. 대 프랑스 제국은 이 재정난을 해결하기 위해서 삼부회라는 제도를 다시 부활시키려고 했다.(삼부회는 과거 루이 13세 대천황 시절에도 있었으나 곧 폐지되었다.) 앞서 말했듯이 귀족들이 세금 내기를 거절했기 때문에 그나마 세금을 낼 자는 백성들 중에서 가장 부유한 중산층이었다. 하지만 그 중산층조차도 세금만 낼 수는 없다고 항의했고, 만약에 우리한테서 세금을 받고 싶다면 자신들도 제국의 일에 참여하게 해 달라고 아우성이었다. 처음에는 대천황과 대신들도 반대했지만, 워낙 재정난이 심했기 때문에 결국 1789년에 삼부회를 소집하기로 결정했다.

이로써 삼부회는 제 1 신분과 제 2 신분과 제 3 신분이 모두 참여함으로써, 대국민의 국정 참여가 본격적으로 시행되었다. 검은 옷을 입은 대국민 대표들 600명이 어두운 시대를 밝히는 촛불을 들고 회의장인 생루이 교회로 향했다. 그런데 삼부회는 열리자마자 엄청난 논쟁 끝에 해체되고 말았는데, 바로 표 계산 때문이었다. 회의에는 제 1 신분과 제 2 신분과 제 3 신분이 참여했는데, 제 1 신분과 제 2 신분의 주장은 사람 수에 관계없이 각 신분의 전체 의견을 한 표로 하자는 것이었고, 제 3 신분은 한 사람이 한 표씩 던져 그 합계로 결정하자는 것이었다. 원래대로 제 3 신분의 의견이 매우 공정하고 현대적이었지만, 아직까지는 제 1 신분과 제 2 신분의 힘이 절대적으로 강했기 때문에 할 수 없이 제 3 신분이 양보를 해야만 했다. 그렇다고 제 3 신분이 이대로 포기할 리가 없었는데.

아무튼 삼부회가 해체되고 나서 결국 제 3 신분은, 대국민 대표들의 모임을 가져야 한다며 1789년에 대 프랑스 제국을 대표하는 대국민 회의의 결성을 결정했다. 이 소식을 들은 제 1 신분과 제 2 신분은 같은 해에 대책 마련을 위해서 회의를 결성하자, 제 3 신분은 이 회의를 무효화하기 위해서 회의장을 습격하려고 했다. 그러나 회의장의 문은 황실 보초병들이 굳게 지키고 있어서 함부로 들어갈 수가 없었고, 게다가 비까지 내려 결국 제 3 신분은 실외에 있기 어려운 관계로 실내인 테니스 코트로 모이기로 했다. 대국민 대표는 테니스 코트에서 모여 역사적인 '테니스 코트 선언'을 했다. 대국민들은 대 프랑스 제국이 정당한 헌법을 제정할 때까지 공동으로 투쟁할 것을 엄숙히 선언했고, 또한 대국민 의회는 필요에 따라 대천황이 원하지 않더라도 반드시 열릴 것이며, 거기다가 특권층들을 봐 주지 않는 공평한 제도를 이룩할 것을 강력히 선언했다! 이런 대국민들의 열렬한 환호 속에 대국민 의회가 탄생했고, 대표는 콩트 드 미라보가 선출됐다.

이 소식을 들은 루이 16세는 이 대국민 회의를 무효라고 선언했다. 하지만 진보적인 성직자들과 진보적인 귀족들이 대국민 의회를 돕기 시작하자, 하는 수 없이 같은 해에 인정을 할 수 밖에 없었다. 만일 루이 16세가 대국민 의회를 진정으로 인정했더라면, 대 프랑스 제국은 혁명을 겪지 않고 입헌 황국의 길을 걸었을지도 모른다. 그런데 대천황과 귀족들은 대국민 의회를 없애기 위해서, 틈만 나면 대국민 세력을 꺾으려고 하였다. 그리고 루이 16세는 대국민 몰래 대 독일 제국과 스위스 제국의 용병을 몰래 파리 특별시로 끌어들여 자신의 황궁에 집합시키는 악행을 저질렀다. 결국 이것이 루이 16세가 낭떠러지로 내닫는 일이 되어버리고 마는데.

특히 루이 16세는 절대 황정을 강요해왔고 그에 걸맞게 독재 정치를 해 왔기 때문이었다. 결국 참고 참아왔던 대국민들은 너나 할 것 없이 혁명을 일으킬 준비를 했다. 저 포악한 대천황을 몰아내고 우리들이 직접 대제국을 다스릴 것이라는 계획도 세웠을 정도로 대 프랑스 제국은 정말로 어지러웠다. 그리고 대국민들은 제국을 새로 갈아엎기 위해서 착실한 준비를 시행해나가고 있었다. 그 증거로 대국민들은 스스로를 혁명군이라고 자칭하면서, 당시 대 프랑스 제국에서 악명이 높았던 바스티유 감옥을 습격하기로 결정했다. 바스티유 감옥은 대제국에 반란을 일으켰거나 혹은 살인 같은 무거운 죄를 지은 사람들이 갇힌 곳이었다. 그런데 그 감옥 안에는 혁명 준비를 해 오다가 대제국의 탄압을 받고 갇혀 있는 열사들도 꽤 많았다. 혁명군은 우선 이 열사들을 구출하고 그들의 힘을 빌어 혁명에 성공하기 위해서 바스티유 감옥을 습격하기로 결정한 것이었다.

이렇게 분위기가 좋지 못했을 때 더욱 분위기가 안 좋게 흘러가고 마는데, 바로 루이 16세의 비밀 외교 문서가 혁명군에 의해서 발각된 것이었다! 그 비밀 외교 문서는 루이 16세가 혁명군을 무찌르기 위해서 외국의 여러 제국들에게 군사 지원을 요청한다는 내용이 들어있었는데, 운 나쁘게도 혁명군에 의해 발각되었으니 더 이상 말할 필요가 없을 정도로 상황이 심각해졌다. 이에 모든 대 프랑스 제국의 대국민들은 물론이고 보수당인 지롱드 당까지 진보당인 자코뱅 당을 돕게 되었다. 끝내 1793년 대천황 루이 16세는 혁명 재판을 받게 되었다. 결과는 말할 것도 없이 사형 판결이 내려졌고, 다음 날 루이 16세는 사형대에 오르기 시작한다. 그 날은 유난히 무섭게 춥고 비바람이 휘몰아치고 있었는데, 아마도 이것은 루이 16세의 죽음을 의미하는 것 같기도 하다. 한 때 그가 타고 다녔던 황금 마차가 지나던 혁명의 광장의 한복판에 세워진 단두대에 루이 16세가 있었고, 세계 최대 강대국 중 한 곳인 대 프랑스 제국의 대천황인 루이 16세가 단두대에 올랐다. 결국 루이 16세의 목은 단두대의 칼날에 의해서 잘려 나갔으니, 이것은 한 시대를 접는 역사이기나 할까.

"비브 라 크헉 프랑스 어피어! 비브 라 레퓌블릭!(대 프랑스 제국 만세! 공화국 만세!)"이 혁명의 광장에 울려 퍼졌고, 누군가가 라 마르세예즈가 우렁차게 부름으로써 대 프랑스 제국의 애국가가 널리 울려 퍼지기 시작했다.

나폴레옹 대천황의 치세[+/-]

놀랍게도 새로운 대 프랑스 제국의 대천황의 자리에 오른 자는 대 프랑스 제국의 식민지인 코르시카 출신인 나폴레옹이라는 자였다. 본래 나폴레옹은 1769년 코르시카에서 태어났고 부모님으로부터 독립 정신을 받아가면서 살았고 비록 코르시카가 대 프랑스 제국의 식민지라고는 하나 자신은 반드시 대 프랑스 제국을 정복해서 대제국을 세우겠다는 원대한 꿈을 품으면서 살았다. 그러다가 나폴레옹은 대 프랑스 제국에서 사관학교를 졸업하면서 장교가 되자 대 프랑스 제국의 실권자로 군림하기 시작한다. 나폴레옹은 우선 군대를 이끌고 대 이집트 제국을 어떻게든 정복하려고 했다. 그 이유는 바로 나폴레옹은 동양 세계에 관심이 많아지면서 경제력을 키우기 위함이었다. 한편으로는 대 영국 제국을 방해하기 위한 방법으로 대 영국 제국이 동양 세계와 무역을 허용하는 것을 막기 위함이었다. 1798년 나폴레옹이 이끄는 군대는 승리만을 거듭하면서 앞으로 나아갔고 결국 대 이집트 제국은 대 프랑스 제국의 식민지가 되어버렸다. 그러나 나폴레옹은 거기서 만족하지 않고 고고학자들로 하여금 대 이집트 제국의 유물을 대량으로 실어 파리 특별시에 전시하게 했고, 이는 대 프랑스 제국이 고고학 발전에 큰 영향을 끼쳤다.

1804년 이 날은 나폴레옹이 드디어 대 프랑스 제국의 위대한 대천황이 되는 날이었다. 드디어 대 프랑스 제국은 공화국의 막을 내리고 대황국으로 나아가기 시작했다. 파리 특별시의 거대한 노트르담 사원에서 나폴레옹과 대 로마 제국의 대교황인 피우스 7세와 나폴레옹의 아내인 조제핀 등이 참여해서 나폴레옹의 대관식에 참여했다. 그런데 대관식에서 나폴레옹은 엄청난 짓을 벌이는데, 바로 나폴레옹 본인이 직접 손으로 대천황의 관을 집어 자신의 손으로 머리 위에 씌운 것이었다! 즉 나폴레옹의 엄청난 야망이 돋보이는 부분으로써, 나폴레옹은 대천황은 이 세상에서 가장 높은 존재로 내 머리 위에 관을 씌워 줄 사람은 있을 수가 없다는 식으로 나온 것이었다. 거기에 그치지 않고 나폴레옹은 조제핀에게도 직접 대천후의 관을 집어 자신의 손으로 조제핀의 머리 위에 씌웠다. 1793년 과거 루이 16세 대천황의 목을 자른 대 프랑스 제국의 대국민들은 절대 황권에 대항해서 싸웠으나, 12년도 못 되어 더욱 절대적인 권력을 가진 대천황을 모시게 되었으니 과연 대 프랑스 제국 대혁명은 무엇을 위한 것이었을까!

하지만 대 프랑스 제국의 대국민들의 반응은 매우 호의적이었고 대국민들은 나폴레옹을 대천황 폐하로 절대적으로 받들며 혁명이 새롭게 시작하며 또한 혁명이 연장되어 새로운 세계를 펼쳐 나갈 것이라고 강력히 주장했다. 그리고 나폴레옹이야말로 시민 계급의 절대적인 지배자이며 대변자이자, 자유라는 이름으로 자유의 단점을 강력히 지적하며 능률적이고 강력한 정부가 필요하다고 주장하기까지 했다.

현대[+/-]

대 프랑스 제국[+/-]

신화적 자료[+/-]

고대[+/-]

중세[+/-]

근세[+/-]

근대[+/-]

현대[+/-]